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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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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서로 화해하라
레위기25:10, 마태복음5:23-24
2018년 9월 16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구원과 화해를 동반하고 선포하며 증언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해 실천의 의지를 보일 때이다. 정부가 오는 9월18일 부터 시작되는 평양에서 모처럼 남북 정상 회담을 앞두고 온 국민과 함께 서로가 한 민족의 바람은 서로가 적대감을 해소하고 통일과 평화를 일구는 일에 하나가 되어감에 이질감을 넘어 민족의 화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 지금은 화해 실천의 의지로서 평화 통일을 염원하면서 화해의 마당을 펼쳐 한 민족이 하나 되고 우리 그리스도교의 교회는 민족의 구원과 화해의 기회를 찾아 교회의 선교와 믿음의 실천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통일의 기회에 모아 기도해야 함을 피력한다. 유대인의 ‘탈무드’ 가운데 교훈을 살피게 된다.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를 낳아보니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희귀한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를 낳은 부모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 부모는 그 아이의 신체가 비록 비정상적이었지만 사랑과 정성으로 양육하였다. 이 아이의 존재는 이웃들의 입을 통하여 점차로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사회 각 층에서는 이 아이를 두고 서로 상반된 여론이 일게 되었다. 그것은 이 아이의 머리가 둘이므로 이를 두 사람으로 보야 할 것이냐? 아니면 몸이 하나이기에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냐?하는 여론이 일게 되었다. 그 때 한 심리학자이기도 했던 한 정신 의학자는 이 문제에 안타까운 마음과 숙고한 나머지 여기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현명한 사람의 기본적인 입장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그 답을 말하였다. 말하기를 그 아이의 한쪽 머리를 쳐서 또 한쪽의 그 사람의 얼굴이 아프다는 반응을 보이면 그 아이는 한 사람이고 또 한쪽 머리를 쳤는데도 다른 한 쪽이 아프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이 아이는 두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 사람의 몸은 모든 신체구조가 한 몸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증명하는 좋은 예를 통하여 한 민족의 분리 분해된 사실을 긍정하고 아파! 하지 않으면 서로가 다른 사람이라는 증명으로 아파하는 한 민족의 아픔을 구경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점을 알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 하나의 민족이 분단의 역사에서 우리 민족은 서로가 미워하고 욕하며 서로를 총칼로 들이대며 살아왔다. 상대방이 쓰러질 때 승리의 환호성을 울렸고 상대방이 무너질 때 축배를 들었다. 과연 그것이 누구의 승리였으며 누구의 기쁨이었나 ? 이제는 남북 정상회담을 통하여 두 몸이 하나 되는 통일과 평화로 이어져 이산가족이 만남으로 삶의 기본적인 한 몸, 한 피가 섞인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버지 사랑과 한 피가 섞인 가정의 식구들은 한 아버지의 피와 살이 아닌가? 생각하며 기도하게 한다. 민족의 화합, 상호 불가침, 교류협력의 뜻을 누가 어이 이를 반대한다는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태복음5장23-24절 말씀]”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접근
시론
2018년 9월 9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한국 전쟁은 민족 간의 내전이면서 동시에 공산 진영과 자유진영으로 나누어진 국제 전쟁이 되었다. 6.25 전쟁을 지내 오면서 한국의 경제가 국제적인 관계로 미국에 의존하면서 자립적인 면이 봉쇄되고 종속적인 관계로 전락하면서 사상적인 측면에서 보아 우파가 내세운 반공 이데올로기는 현재에 이르기 까지 반공 이념으로 지배되었고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경제가 의존적이 되어 자립적인 길이 봉쇄되고 종속적으로만 향하여 오던 중 종속적인 
발전의 가능성만 오늘에 이르기 까지 잔여로 남기게 되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서도 흑백 논리에 근거하여 이분법적인 사회 심리를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동안 한국 교회도 그 영향에 근거하여 공산주의를 인식하는데 유물론에 근거한 마귀의 세력으로 몰아가는 경향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계속되어 온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반공적 태도가 환히 드러나 버렸다. 여기에 한국 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당하거나 실종된 교회와 교회지도자를 많이 잃기도 하였음을 알게 한다. 이로 인한 반공 논리가 심각해 왔음을 알게도 한다. 이렇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피해는 일후 말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이 민족사에 반공이념으로 남북 간의 동족이 분열되고 반공의 이념이 남과 북을 이제는 다시 남과 북의 갈등과 분열로 먹고 이로 인한 하나의 민족의 정체성으로 분열을 막고 갈등을 해소하려 서로의 갈등과 분열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평화와 화해의 실현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있는 것 같아 더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한다. 하나의 가정이 분열하는 그 가운데 한 가정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한 가정의 분란에 용서의 기도를 드려야 하듯이 같은 형제가 부모님 앞에서 서로가 용서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극히 타당한 서로가 사랑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한 민족은 남과 북이라는 이념의 갈등으로 살아오면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이질적인 두 사회 체계로 서로 나뉘어 냉전이라는 가혹한 대립으로 두 진영으로 갈라서서 살아왔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지우고 우리는 서로가 한 겨레의 배달의 민족으로 6.25 전쟁을 겪으면서 이제는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한 때 민족의 긍지를 가지고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논 하여 오다가 자유세계의 지성인들과 제3세계의 지도자들이 조국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제3세계의 지도자들의 견해를 터득하게 되었다. 이는 여기에 경제성장을 도모하고 조국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제3세계의 지성인들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외치어 왔다. 여기에 공산세계에서는 평화공존을 외치면서도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인정하지 않았음에 그 과거를 주목한다. 여기서 60년대 중엽부터 주의나 이념을 멀리하는 양 사회체제가 현대기술문명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통해서 서로가 접근해 가고 있음을 오늘의 모든 민족들이 사회 형편의 사실에서 이를 실감하게 한다. 60년대 중간에 나타난 양사회체계가 현대기술문명과 산업경제의 발전을 보면서 여기에 모두가 접근해 가고 있을 때 서로의 양쪽 이데올로기의 대변인들과 학자들을 통해서 서로 비판하기도 하였으나 양쪽의 경제학자, 사회학자, 교육학자들은 접근설을 긍정적으로 시인하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서 지나온 7,4공동성명은 상호 준비가 서로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화의 문을 열어 놓았음도 알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체계와 공산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체계가 그 시대의 발전과 여기에 근접한 산업사회를 향해서 가야 함을 알게 한다. 이것은 오늘의 삶의 처지는 제 4차 산업사회를 맞으며 인공지능기술 및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 등 정보통신기술(ICT)과의 융합을 통해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되고 제품과 서비스가 지능화 되면서 여기에 따른 경제와 사회 전반에 혁신적인 변화를 맞고 있음에 여기에 따라 사람의 인지나 사회적인 삶에 변화도 맞게 되었음을 많은 것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맞아 새롭게 변화를 갖게 함에 이해타산이나 과거의 관습들이 많은 변화를 맞아 발전하고 있음을 터득하게 하는 분위기의 삶을 살고 있기에 지금은 많은 변화와 인식차원을 달리하고 변화발전하고 있음에 주목하는 시대를 맞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2016년 1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정보통신기술 기반의 새로운 산업시대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었으며 캄퓨터,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화 혁명 (3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혁명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함에 이르러 삶의 자세도 점차 발전해 가는 미래 지소적인 삶의 태도에 많은 변화를 안고 있음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처지를 현실로 받으면서 삶의 변화에 고착화한 삶에서 탈피하여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삶의 변화 갱신을 통해 미래 지향적인 태도를 느껴보게 한다. 근대 민족주의는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에서 처음 발현됨에 오늘의 이 시대의 크리스천은 생각해 볼 일이 많다. 
{마태복음5장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아 멘.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낙태는 생명에 대한 부정행위
창세기3:24.요한복음14:1-6
2018년 9월 2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이 세상 우주 공간에는 수많은 생명들의 삶이 있다. 여기서 살아가는 우주 공간의 생명체중 인간들은 때를 따라 변화하면서 환희와 아픔을 나누며 가는 세월 따라 살아간다. 이 삶은 약속을 지키며 순리로 사는 삶도 있고 순리를 어기며 사는 자들도 있다. 세상의 모든 삶은 약속 아래에만 서로 이를 지키며 살기도 하며 순리를 어기며 사는 이 질서를 지키지 못한 자들로 삶을 살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의 약속을 지키며 사는 자와 약속을 어기며 사는 자들도 있다. 사람이 삶을 살다보면 기쁨과 아픔이 공존하듯 그 삶이 인연임을 알기도 하고 숙명으로 알고 살아가기도 함을 알게 한다. 여기에 이 세상에 생명으로 오신 주님은 오직 삶의 주인이시며 구세주는 우리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심을 믿는다. 그 약속들은 성서의 하늘의 말씀을 믿는다. 그리스도교의 성서의 말씀들은 모두가 약속으로 채워져 있다. 그 약속을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이를 믿는다. 이는 약속을 시련하는 자라야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믿고 구원함을 이루는 진리를 믿게 하는 것이다. 믿음은 곧 약속이요 여기서 그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심은 믿음에 있음을 알게 한다. 요즘 항간에 낙태에 대하여 존치론이 극성을 부리고 있음을 보게 한다. 
산모가 미성년자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 아닌 바에야 ‘스스로의 의지로의 행한 성행위의 결과물로 임신이 됨을 안다. 그 예로서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성행위의 결과물이다’라는 산모역시 알고 있으면서 태아를 살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사실로 인정하고 살아 왔다. 여기서 산모가 미성년자라고 해서 타당성을 주장해서는 아니 됨도 알게 해야 한다. 또한 그 사실 자체를 어기고 핑개 삼아 한 생명의 태어남의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하늘의 약속 어김을 알게 해야 한다. 이는 곧 생명의 책임은 태어남의 약속을 어기는 잘못을 알게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책임이 무거움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 우리 삶의 자리는 언제나 그러 하듯이 남아 선호사상이 극에 달해 왔으며 남녀 성 비율이 무너지고 불법적인 낙태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어 왔으며 80-90년대의 여아 낙태 문제를 알게 하는 습성이 생기기도 하였음을 알게 한다. 오늘에도 역시나 남아 선호 사상이 늘어나고 우선하여 낙태를 하는 사례가 생겨난다면 아니 이 법안을 성안허여 합법화 한다면 산모가 낙태로 죄 의식을 강요받은 삶을 누린다면 생명 살해의 큰 죄를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와 생명에 대하여 용서받지 못 할 죄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흔히 우리 삶의 현장에서 보면 많은 장애아를 둔 부모들을 보게 된다. 사실로 오늘의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처지를 놓고 보면 상당 부분을 부모에게 장애아를 맡기는 것을 우리 삶의 현장의 현실로 보게 된다. 여기서 낙태를 결심할 경우 장애아의 그 인생의 상당한 부분을 부모에게 기대는 것 또한 우리 삶의 현장이요 현실이 되어 왔다. ‘그들은 행복한데 왜? 그들은 죽이려 하느냐?’ 오늘의 현실 삶에서 장애아를 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그러므로 사회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에서 가족 중 ‘중증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가족 중 누군가? 혹은 가족 전체가 큰 고통을 받는 것은 어느 나라이든 간에 삶의 현실임을 알게 한다. 사실로 여기에 따르는 고통은 여간이 아니다. 이 요인은 개인 차원에서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수입 면에서도 불이익을 불러오는데 여기에 따르는 개인적인 용무나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요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경제적인 면, 병원 치료비. 등 많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이러한 형편에 실로. “이겨 낼 장사가 있겠는가?” 생각하게 한다. 
세상에 생명으로 태어나 자기 생명 됨에 그 행동 가짐은 여러 가지를 여부 간에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 낙태를 자유롭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여성해방 이라고 긍정적인 것 같으나 여성인권을 해치는 것임도 알아야 한다. 낙태수술을 받는 입장을 생각해 보면 낙태수술은 당사자인 여자가 수술을 받는다는 현실의 사실을 본다. 이는 곧 낙태허용이 여성인권을 위한 길인 것 같아도 아님을 알게 한다. 낙태허용론자의 주장은 미혼모의 경제, 사회적인 인식문제, 장애아동 문제, 강간문제 등은 전부가 사회적인 문제로 이를 피하려고 한다. 여기에 우리는 사회적인 근본문제임을 터득하게 한다. 태아가 곧 생명인 것처럼 여기든 과거의 낙태로 보면 현대에 낙태 찬성론자들은 태아는 애초에 생명이 아니라 세포라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낙태 찬성론자들은 어느 시점에서 부터 인간으로 여길 것인지? 낙태 결정 후 유전체검사를 해서 성별검사를 하여 성별포함 원하는 유전자 세트를 가진 아기라면 낙태를 취소하고 사회통념상 평균범위 안건으로 삼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낙태를 진행하는 경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도 자식의 사교육과 성형수술에 막대한 비용을 들이는 부모들은 자기들 유전자를 바탕으로 친아 천재급 보고서를 낸 디자인베이비를 만들어 낳고 성공만을 바라며 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은 과학으로 사람됨의 기능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 공동체를 통해 사랑을 알고 배우며 사물의 판단과 마음으로 하느님의 형상을 입어 생명의 긍지로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인간의 참된 삶의 길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 성서는 삶의 길을 제시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