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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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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삶의 길
누가복음9:57-58, 마태복음8:19-20
2017년 12월 10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한글개역성경에 누가복음의 9장 본 문에서 주님의 '제자 됨'의 길을 생각해 본다. 누가복음 전체의 '제자'라는 말이 누가복음 9장에만 11번 나온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흔히 제자 됨으로 사역이나 목회를 위한 수단으로 생활하는 제자가 아니라 제자 됨의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본문 9장을 살피게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은 주로 3권의 공관복음서에서 주로 나타난 그 제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한다. 제자 됨의 선한 의도나 받은 영광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피게 한다. 제자 됨의 생활은 문화생활의 일부나 시간이 남으면 사역하는 생활이 아니라 제자 됨은 나이(연령) 여하를 막론하고 예수님의 삶이나 하느님의 나라 일을 위해 최우선 순위에 두는 그런 삶으로 생활하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친히 보여 주시듯이 들짐승이나 날것들보다 못한 노숙자 신세가 되는 길도 열어 보이신다. 57절- 58절에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심은 제자의 사역(使役) 길을 위해 거처도 없는 생활수단도 없는 그의 삶을 확실히 보여 주심에 인지(認知)하게 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다. 예수님의 삶은 가르치기 위한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삶의 스승이요 그 분이 내안에 사심을 사실로 인정하고 순간마다 자기를 인도하시고 해야 할 바를 깨닫게 하신다. 예컨대 바로 그 순간 부싯돌에 부딪치듯이 섬광과 같이 빛나는 광채를 본다. 이는 생명의 삶은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자아, 그분의 인격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게 하신다. 그리하여 디트리히 본 회퍼는 삶을 말하면서 항상 "그분께서 제 안에 계심을 느낍니다. 그분은 순간마다 저를 인도하시고 제가 말하거나 행해야 할 바를 알려주십니다"라고 한다. 아직도 우리 인간들은 생명에 대하여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생명은 삶의 명령을 받아 자기의 삶을 책임 질 줄을 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살아있는 인간을 통하여서 삶을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 삶의 에너지는 창조 그 자체에 의해서 의지하고 이 삶 조각의 에너지는 우주 에너지에 의해 흡수된다. 창조는 인간에게 어떤 명령도 요구하지 않고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모양새에서 그의 말씀과 질서를 통해서 창조의 삶의 목적을 갖게 한다. 이 창조는 어떤 모습으로 한정되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모습은 자유롭고 기쁘게 삶을 살아간다. 생명은 여타 생명과의 서로 생명작용에 의한 고유한 살림살이가 가능한 개체물질의 총칭으로 정의하고 생명은 모두가 창조적인 삶을 스스로 꾸려 갈 수 있는 무한하고 신비로운 능력인 영 혹은 영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생명을 대할 때는 목적으로 상관하여야 하지 수단으로 대해서는 아니 된다. 생명은 서로 간에 사랑에 의한 나눔으로 모두가 평등한 생명공동체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생명들이 추구하는 보편타당한 진리는 '아름다운 살림살이'이다. 이 '살림살이'는 생명의 살림을 조화롭고 건강하게 꾸리는 모습, 그 모양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자기부인은 정상적인 생명으로 생명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생명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배려가 전제되는 살림의 생명이다. 이 삶은 자신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한 암적 존재로서 이를 죽임의 생명을 말하게 한다. 
베드로는 당시에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였고, 그리하여 수제자까지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말렸고 그리하여 사단과 관련된 책망까지 받게 되었다. 예수님은 육체의 구원자가 아니라 전인의 구원자였고, 이를 위하여 혼연히 먼저 죽음의 길을 가셨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치르게 하시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행하심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기 위해 오셨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시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그분께서 당하실 일에 반대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시려고 오셨다는 것과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음에 주목한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생명공동체에 의한 공유적이거나 사랑을 바탕으로 배려, 나눔에 의한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 공존 공생하는 삶을 알게 한다. 사람이 향유하는 모든 능력은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지 결코 절대적인 것은 없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어느 무엇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인간은 시한부적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삶은 하루 세끼 먹고 계절을 따라 옷 입고 하루 잠자는 것으로 세월을 사는 것이 인생살이이다. 이 인생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는 창조자의 의도를 따라 사는 삶을 말하고 하나님과의 영적교제를 가져야 하는 당위적인 믿음을 갖게 한다. 흙으로 빚은 질그릇 같은 인생살이는 하나님의 영을 지닌 존재로 사람다운 삶으로 삶을 살아야 함을 알게 한다. 이는 삶의 목적이요 삶의 가치임을 알게 한다. 루터가 그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 쓴 말은 여전히 신앙과 삶에 귀감이 된다. 이신득의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이다. 사람이란 남과 함께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옳게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성서는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예수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태어나 오심의 뜻을 신앙하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구주 예수를 만남
시편56:13, 요한복음1:14,6:53,히브리서 11:1
2017년 12월 3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생명으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이며 출발점과 시작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며 하느님의 몸을 힘입은 성육신의 오심을 의미한다. 이를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확신한다. 이는 여기에 오시는 분의 기다림에서 맞이하는 것은 한 삶의 역사적 사건이며 삶의 현장에 말씀으로 영으로 새롭게 임재 하심에 대한 경의이며 ‘구주 예수로 오심’의 의미는 말씀이 육신으로 오심의 의미를 알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창조하심을 입은 생명들에게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이루어 가시는 삶의 현장에 중요함을 알게 하고 비인간화의 역사에 오시는 생명의 말씀이 오심이기에 삶의 주님을 맞는 경축만이 아니라 구원함을 받는 삶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기에 태어나심의 경축에만 국한 한 것이 아니라 삶 전반에 따른 삶의 고백임을 알게 한다. 이 고백의 말씀 속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가운데 만고불변의 법칙은 ‘생명’만이 생명을 생성시킬 수 있는 생명원인이 가능하다는 것에 믿음을 깨닫게 한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는 원래 선 했으나 인간들의 삶의 타산에서 망가지고 훼손되어 창조질서가 망가져 자연의 생태계의 변화가 생겨 온 세상은 오늘에 와서 오염된 생명으로 가득하게 됨을 알게 한다.
여기에 그리스도교만이 하느님의 창조질서 회복에서 생명의 고백신앙을 알게 한다. 이제 여기에 우리 인간은 모든 생명 관계에 관계를 가지고 하느님의 창조하신 그 뜻을 따라 섬기며 책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의 약속을 다하여 지켜가야 한다. “구주 예수로 오신 구세주께” 함께 기도하며 생명의 약속의 말씀을 순종하는 신앙고백으로 ‘구주 오심’의 날에 온전한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기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했다. 지금도 미래에 속한 소망이지만 그것을 현재 실상으로 갖고 있는 것같이 확실하게 지금 현재화하는 삶의 태도는 지금 아직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확실하게 현실화 하는 삶의 태도를 미음으로 극복하기를 기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같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일반적인 생활태도라기 보다는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라는 삶의 믿음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컨대 ‘나’라는 인격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향해 신뢰와 존경으로 자기를 개방하는 결단이며 상대에게 자기를 개방하여 그가 나와 인격적 교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말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나와의 정상적인 인격관계를 갖고 ‘나와 너’의 (I and Thou)인격적 관계이지 ‘나와 그것’(I and It)과의 관계가 아니다.
여기에 20세기 신학자 ‘마르틴 부버’의 (Ich und Du)는 ‘나와 너’ 관계를 말하면서 관계의 근본적이고 가장 순수한 형태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이며 이 관계는 인간관계의 전형이고 인간관계를 나-너 관계로 만들 수 있다고 한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나-너’관계이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는 종종 ‘나-그것’과의 관계가 된다는 점에 유의한다. ‘나-그것’의 관계는 상대를 사고나 행동을 인격의 대상으로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른 피조물과 사람의 관계는 때로는’나-그것의 영역에 가까이 다가 설 수 있고 그 관계 속으로 빠져 들 수 있음에 유의하게 한다. 흔히 사람들은 사람을 일컬어 가장 진보된 고등동물이라 한다. 지능이 높고 서서 걸으며 말과 물건을 만들거나 무슨 일을 하는 데 기구를 만들어 쓸 줄 아는 알고 사람의 됨됨이로 인간으로 행세하며 사람의 됨됨이로 세상에서 삶을 인격으로 살 줄 알기에 생사화복으로 그 삶이 덧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성서의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요6:53) 하심에 주목한다. 이 사실을 들은 유대인들의 귀에는 거슬린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인간들의 삶에서 살과 피가 되게 하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 삶의 세상의 삶의 마지막 이별 식탁에서 예수께서는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은 내 피이다’ 하는 성만찬의 상징적 예전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피력하신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에는 말씀을 먹고 그 말씀을 소화하여 그 생명으로 사는 인간의 참된 관계에서 믿음의 삶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나의 삶의 ‘구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은 삶을 구원하는 메시지임을 필히 알아야 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크리스마스 케롤이 세상에 울려 퍼진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지진을 보면서
고린도후서8:9, 마태복음5:48
2017년 11월 26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지진은 자연재해 중 가장 큰 자연재해이다. 금번 경북 포항 지역에 매우 큰 지진이 발생했다. 현장은 매우 심각해 많은 시설물과 이재민이 발생하여 진학하려는 국가고시도 연장하는 위급한 사실이 나타났다. 빌딩, 아파트, 주택이 모여 사는 도시에는 강진으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기마련이다. 이러한 차제에 정치인들이 지진은 현 정부에 대한 하늘의 경고라고 하기 까지 말하고 있음에 사이비 종교 집단의 말세론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큰 유무형의 공동체를 이상 국가나 하늘나라 같은 중요한 점을 제시하려 함에는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흔히 값 싼 복음으로 신앙을 고수하려는 믿음에도 이를 재앙으로만 강조하여 그리스도교의 말세론을 대신하려는 위험을 막아야 한다. 여기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앙을 살펴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8:9) 이라 한다.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삶은 결코 좋은 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헤쳐 나가는 데는 믿음의 행위로 어려운 면을 헤쳐 나가는 믿음의 용기도 필요함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 사시는 삶의 자세는 늘 자기를 내주면서 큰 공동체의 삶을 보여 주심이시다. 높은 권세는 그 자신이 스스로 낮아짐에서 만족을 얻는 교훈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이요 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따르는 점을 삶에서 깨닫게 한다. 하늘과 땅은 진리의 근본이요 인간생명의 근원이 된다. 인간은 하늘과 땅에서 태어나 살다가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 여기에 인간은 자연의 변화를 떠나서는 존재 할 수 없는 삶이 있음을 알게 하여 하늘과 땅에서 사는 삶의 의미는 변화를 보는 삶을 깨우치고 그 섭리를 이루어 가는 삶에서 그 이치를 알게 한다. 이러한 뜻에서 마태복음5:48절의 말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 하여라”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불안전한 가운데 모든 피조물은 소멸을 향하여 가고 있음을 차제에 깨닫고 하늘과 땅은 하느님의 창조함을 받은 진리의 원형이자 인간 생명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 태어나 생명을 유지하며 살다가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는 귀소본능의 귀소성을 가진다는 즉 자기 둥지로 왜? 돌아간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소멸을 향하여 가고 있는 상황, 인간은 유무형의 공동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의 삶을 알아야 한다. 혹자는 누군가를 향한 하늘의 경고를 언급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동일한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런 어리석음은 피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인간의 삶은 개인적인 만큼 이웃과 함께 사는 공동체적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공동체 삶은 윤리적 삶을 따라야 하고 여기에 삶을 넓히는 길을 찾게 된다. 이 길이 삶의 고통과 비극, 재난에서 행복한 삶을 깨닫게 한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삶의 윤리를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주면서 큰 공동체를 만들었다. 높은 권력(권세)은 그 자신의 낮아짐에서 만족을 추구하여 세상을 일구어 내려고 함을 알게 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교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정체성이다.
모든 피조물은 소멸을 향하여 가고 있는 상황과 인간의 삶은 유무형의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하늘의 경고를 언급하면서 자기는 정녕 이를 피하려 한다. 이는’나는 다른 사람과 동일한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된 삶의 자리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버리고 이번 “지진을 보면서” 지나온 삶에 대한 태도로 재난을 재앙으로 알고 행하는 믿음의 태도는 버려야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