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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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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새로운 시작
신명기20:10, 누가2:14,로마12:18
2018년 6월 24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남북분단은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들의 군사적 이념적 대결의 상호분쟁 속에서 우리 민족은 속죄양의 고난을 당하여 왔다. 민족의 분단이 가져 온 결과는 지금까지 장기화 되면서 남과 북은 안보와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인권은 유린되고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억압되어 왔다. 우리민족이 갈라서서 있는 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서로 비방하여 싸우며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서로가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죄인으로 서 있음을 알게 한다. 믿음은 장래 결과를 미리 보는 것이다. 하느님은 서로의 마음에 약속들을 새겨 믿음을 낳으시고 다양한 일들을 일으켜 믿음을 도우신다. 여기까지 오게 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이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며 보는 것이다. 하느님은 약속을 돕고 성취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기다림’만이 우리의 몫이다. 기다림이 없이는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감추어 두신 하느님의 기다려야 할 일들을 보아야 한다. 이는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 인내, 기다림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도 낭비하는 시간도 아닌 하느님께 간구하는 믿음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자는 어떤 핍박도 환난과 고난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민족 자신에 의한 자각, 또는 집단에 의한 인식(민족의식)을 계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현실에서 활성화되는 것은 외부와의 몇 가지 연관관계를 통하여 민족 자신이 자기의 존재(또는 특수성)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족의식을 각성하게 될 때 가능해진다. 민족의 경계설정에 사용되는 지표는 사회생활 전반에 걸치는 것도 있고 사회생활의 특정 분야에 한정되는 것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의복, 언어, 가옥형태, 일반적 생활양식 등의 명시적인 것도 있고 추상적으로는 가치관·윤리관·행위기준 등 문화내용적인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민족 범주와의 사이에서 인원의 개별적인 이동·접촉·혼인·동화 등의 현상이 생겨 민족성의 지표가 되는 문화특징 자체가 변용된다는 것이다. 민족 범주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구성원과 비구성원 사이의 이분화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다. 평화는 상대 개념으로 쓰이는 전쟁의 목적, 원인, 방법 등의 변화와 더불어 평화의 개념도 달라진다. 평화를 뜻하는 말로 유대교의 샬롬(salom), 그리스의 에이레네(eirene), 로마의 팍스(pax), 중국의 화평. 인도의 샹티(santi), 각각 정의, 질서, 친화와 평온, 편안한 마음을 평화의 주요소로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서양 문명권에서는 평화가 정의의 실현.(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질서유지(pax Romana)라는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 영향권에 있던 인도에서는 마음의 평안함을 목표로 하는 내향적, 비정치적인 태도로 평화를 추구한다. 이는 경제가 공유되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범죄가 없는 사회라는 그러한 정의로만 알고 이해하고 있기에 전체의 의미를 알아 평화의 개념을 사회 정의에서 찾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실행해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우리 민족이 과거 6·25전쟁을 생각해 본다. 이는 같은 민족끼리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 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 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 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오늘에 와서야 그 평화가 열리고 있다는 점은 하느님의 하늘의 뜻이 민족의 소원인 “통일”로 가는 기회로 “평화!”의 길로 가야만 한다.
성서에서 ‘평화’(화평, 평안, 평강)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고 그리스어로 에이레네(eirene)로 두 가지 말의 의미는 평화를 일컬어 전쟁이 없다는 원어에서 ‘평화’를 뜻하는 말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인사말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자주 인사말로 사용했으며 작별인사로는 “평안이 가라”고 인사말을 하셨다. 여기에 바울과 베드로사도는 그의 편지 앞부분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 글로 편지에 문안으로 살핀다.
서양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는 평화가 정의의 실현(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질서유지(pax Romana)라는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띠었고, 힌두교 영향권에 있던 인도에서는 마음의 편안함을 목표로 하는 내향적·비정치적인 태도로 평화를 추구했으며, 중국에서는 〈예기 禮記〉 예운편(禮運篇)에 실려 있는 "권력을 독점하는 자가 없고 평등하며, 재화(財貨)가 공유되고 생활이 보장되며, 각자가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범죄가 없는 사회"라는 대동(大同)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 평화의 개념을 사회정의에서 찾았다. 현대에 와서는 ‘평화’를 국가적인 평화와 국제적인 평화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국가적인 평화는 통상 자본주의 민주국가의 정치적 이상인 사회정의의 실현을 통한 국민들의 정치·사회·경제의 안녕과 안정을 꾀하는 것이며, 국제적인 평화는 국가간의 갈등·분쟁·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제 우리에게는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의 민족인 우리에게 시대적 소명이 있다. 하나의 민족이 하나 되기 위해 새로운 시작으로 평화를 이루도록 인사 문화로 “평화! 새로운 시작입니다!”로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로마서 12:18)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
누가복음2:14,에베소서4:3, 로마서14:8, 전도서3:8
2018년 6월 17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성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하느님의 약속을 알고 믿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때가 차서 그 약속이 성취 된다. 이 약속은 하느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지나서야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 때 까지 삶은 결코 쉽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그 약속들을 지키는 자들이 성서에 나타난 많은 인물들이며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인물들임을 알게 한다. 믿음은 약속들이 이루어진 사실을 믿고 따른 자들임을 믿게 한다. 이 약속은 하느님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사실임을 믿게 한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이 이루신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24년의 기다림에서 아들 이삭을 얻었다.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알게 한다. 야곱이 베델에서 받은 하느님의 약속도, 요셉이 어린 나이에도 13년의 고통의 세월동안 13년의 어려움을 보냈지만 환상을 통해 약속을 지켰으며 다윗도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고 어려운 난관에도 믿음으로 약속을 지켜 냈음에 주목하게 된다. 이 세상에 어떤 어려움도 하느님 앞에 믿음을 가지고 신뢰를 구축하면 그 때를 이루신 분은 곧 하느님이심을 믿음으로 이를 구축해 가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어려움도 약속에 신뢰를 구축하여 믿음으로 다 하면 이를 역사에서 갖는 시간에 ‘때’를 이루어 내신 새 역사를 알게 하신다. 이는 신앙생활이 가져 온 즉 주신 약속에 신뢰를 구축하면 약속들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믿음임을 믿게 된다. ‘하느님의 때’는 간구만이 이니라 기다림이다. 
금번에 세계가 주목하는 뉴스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위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북한의 비핵화가 궁극적인데 반하여 이를 경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로 넌지시 전하여 서로의 상통의 기회가 생겼다. 향후 정부의 대북 지원 방식에도 관심이 집중되어야 함을 알게 한다. 이는 미국 국내법상 대북 제재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트럼프 행정부의 운신의 폭이 좁다는 점에서 한국, 일본. 중국의 정부도 함께 주도해서 ‘북한 재건 펀드도 만들어 북한 경제 개발을 돕는 방법을 제시하려 함에 이를 모두는 그 방법을 공유함에 이의가 없다고 자문하는 지혜를 비추기도 한 점에 이를 예의 주시한다. 미국 국내법상 미국 의회가 국내법상 대북 제재를 풀어 주기 힘들 것이라 이유를 말하기도 하면서 여기에 자상하게도 북한이 IMF회원국이 되지 못해도 소규모 지원은 받을 수 있고 세계은행 같은 일부 국제개발은행은 이사회 승인 등을 통해 지원을 할 수 있다고 귀띔도 알게 함에 예의 주의를 끌기도 한다. 한국 역시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걸치며 남북 간 교류 협력은 포괄적인 제한을 받고 있는 상태를 거치어서 한동안 “남북 간 조류협력은 “5’24 조치”를 해제하는 결단을 내려야 함에 이른 점을 유의하기도 하지만 여기에 남과 북은 동시에 서로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남과 북이 서로 약속해야 한다. 이러한 명분으로 서로의 관계를 개선함에 이르고 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지난달 24일 핵 실험장 폭파에 이어 미사일 엔진 실험장을 파괴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과 미사일 엔진 실험장 해체는 비핵화의 첫걸음이지만 폐기 절차는 서로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순차적인 절차를 따라야 서로의 양해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에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하기를 기도한다. “함께하는 평화”, “함께여는 미래”를 위해 온 민족이 기도하는 제목이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 민족은 종전을 넘어 “세계 평화로!” 향하는 우리 한 민족은 성서의 말씀에 의지하여 한 민족의 공동체로 ‘함께하는 평화!’ ‘함께 여는 미래’로 약속의 실현을 위해 ‘약속공동체’가 되어야 민족 공동체가 된다는 사실을 설득한다.
남북분단은 현대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의 정치구조와 이념 체제가 낳은 죄의 열매이다. 세계 최대 강대국들의 군사적 이념적 대결의 상호분쟁 속에서 우리 민족은 속죄양의 고난을 당하여 왔다. 민족의 분단이 가져 온 결과는 지금까지 장기화 되면서 남과 북은 안보와 이데올로기의 명분하에 인권은 유린되고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는 억압되어 왔다. 우리민족이 갈라서서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서로 비방하여 싸우며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서로가 하느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죄인으로 서 있음을 알게 한다. 지난 새천년이 되는 2000년이 되던 한 즈믄 해는 2000년 성령강림절 첫 주간에 분단 이후 남과 북의 두 정상이 성사되어 평양에서 만나 둘이 하나 됨의 포옹을 나누었고 환영하는 평양시민들의 미친 듯한 환영하는 모습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의 큰 성령의 역사이심을 보게 함이었다. 여기서 살피는 믿음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는 제물은 하느님이 받으시지 않으며 너의 형제와 화목하고 난 제물만 축복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화해함’의 은총을 깨닫게 한다. 믿음은 장래 결과를 미리 보는 것이다. 하느님은 서로의 마음에 약속들을 새겨 믿음을 낳으시고 다양한 일들을 일으켜 믿음을 도우신다. 여기까지 오게 하는 것은 기다림이다. 이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기다리며 보는 것이다. 하느님은 약속을 돕고 성취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기다림’이 우리의 몫이다. 기다림이 없이는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감추어 두신 하느님의 기다려야 할 일들을 보아야 한다. 이는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순종, 인내, 기다림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기다림은 정지해 있는 시간도 낭비하는 시간도 아닌 하느님께 간구하는 믿음의 약속을 포기하지 않는 시간이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자는 어떤 핍박도 환난과 고난 앞에서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인들의 “평화를 기다리는 믿음”의 고백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한 민족의 정체성은 서로 사랑
에스겔16:63, 누가6:37, 마가11:25,에베소서4:32,로마12:18
2018년 6월 10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한 나라 한 민족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 온 우리 조선민족이 일본에게서 일제 강점기로 살다가 해방을 맞는 기쁨도 체 가시지 않는 우리에게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독립도 잠시 미국과 소련과의 이념의 차이로 우리 민족은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된다. 이후 우리 민족은 갈라서게 되어 남한은 3년 동안 미군정을 실시하였고 북한은 김일성정권으로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다. 여기에 서로가 서로로 같이 하지 못한 체 한 나라가 두 체제로 나누는 현실에 한민족은 분단국가로 살아오고 있다. 여기에 당시 김구와 김규식 선생은 한 민족의 서로의 역사를 안으며 남과 북의 단독 정부를 반대하고 하나 된 정부를 위해 노력함을 알게 한다. 그러나 1949년 안두희가 김구 선생을 암살 하면서 한 민족의 정체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6.25전쟁은 북한이 소련으로 부터 많은 탱크와 물자를 지원 받아 1950년 6월25일(주일) 새벽에 남침하여 한민족이 두 나라로 갈라서는 아! 잊지 못할 6.25전쟁의 비운을 안기어 오늘에 까지 68년이리는 긴긴 세월을 한 배달민족이 원수처럼 살면서 한 민족이 원수처럼 살아 온 삶을 살게 됨에 대한 ‘서로 사랑’을 살아오지 못하고 살아 온 점에 회개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두 이념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명분으로 같은 민족이 싸우는 서로 대립으로 민족의 수치와 갈등으로 서로가 전쟁하며 살아 온지 68년 동안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음을 우리 한민족은 알아야 한다. 
오늘의 세계인들의 나라를 살피면 한 민족이 지금껏 나누어 서로가 갈등하며 살아 온 분단된 국가는 세계에서 우리 한반도뿐이다. 그러므로 통일은 하나 된 민족의 간절한 염원이며 반드시 하나로 일구어야 할 통일의 소원이며 하나 된 민족의 통일 염원은 우리 한 민족이 ‘서로사랑’ 하지 못한 채 이는 68이라는 세월 동안 한반도는 하나의 나라가 두 민족으로 서로 미워하고 반목하며 살아오고 있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이제 성숙한 세계지위에 오른 하나의 민족은 "한 민족 정체성"의 회복을 위해 하나 된 민족을 이제는 찾아야 한다. 민족의 정체성은 혈연, 영토, 종교, 역사, 관습 등이 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남한과 북한이 통일 정책으로 한 나라와 한 민족의 이념으로 우선하는 하나 된 민족적 슬기를 모아야 한다. 그동안 남북 간의 통일정책을 비교해 보면 남한의 통일 정책은 단일주권 국가로의 민족적 정체성의 통일을 목표로 '선 평화 후 통일의 기조와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에 입각한 점진적, 단계적 접근으로 통일을 추구해 온 반면에 북한의 통일 정책은 '전 조선의 혁명 완성'을 위해 연방제로의 통일을 목표로 '선 조선의 혁명 완성'을 위해 후 조국 통일'의 기조위해 자주, 평화통일, 민족단결의 원칙에 입각한 급진적, 이상적 접근으로 통일을 추구해 왔다. 이제 지금은 전 세계가 한 세상에서 서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 하는 하느님의 한 형제간의 피조적 인간으로 삶을 향유하여 평화가 없는 삶을 얽어매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삶에서 살아 온 결과로 살아 온 만큼 심판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하나님의 정밀한 심판에 서게 된다는 믿음을 알게 한다. 비록 죄 된 인간의 삶이 성화되면 비록 살면서 죄를 지었을지라도,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기에 그 삶은 구원함을 받는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알게 한다. 이는 자기의 수행과 노력만으로는 아니 되고 예수님의 살과 피의 공로를 받지 않고는 생명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사람과 우주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창조함을 받은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한바 지음을 받은 그 의도(뜻)되로 따르는 것이 이 모든 이치의 뜻이 여기에 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사는 삶은 그 이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정성스런 창조의 일터에서 사는 삶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삶의 길을 제시하여 보여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음의 십자가 지신 것은 만인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을 알게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정성스런 창조의 일터에서 사는 창조자의 뜻을 사랑으로 깨우치려 함임을 알게 한다.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삶의 예술가이다. 여기에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이 주신 타고난 재질이나 복의 천분으로 성심껏 자기인생의 행로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재물의 탐욕에 만연한 삶이 황금만능주의로 배금주의에 따라 돈이면 최고의 가치로 여겨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세상의 삶에서 말세를 보고 있다. 성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함이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고백이다. 이는 한 생명의 기본 명제이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갈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데 관해 생각을 가지는 존재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생각은 사람만이가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세태는 생각은 제처 놓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느낌과 감각으로만 삶을 누린다. 요즘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고 느끼는 감각의 갈대이다. 배워서 지식은 많아도 지혜가 없는 삶에서 공연히 바쁘기만 하고 차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정체를 모르고 지식의 과잉과 지혜의 빈곤에 허덕이는 것을 보면서 요즘 그리스도인들의 성서 본래의 믿음을 상실하고 가지지 않아야 할 소유욕에 시달리고 있음을 본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삶은 이러한 삶의 징후로 서로가 시달려 고통을 당하게 한다. 오늘의 우리 삶의 그늘숲이 바로 여기에 기존한다. 그리하여 오늘의 문명시대를 말하기를 기술혁명시대, 자동화시대, 정보화시대, 대형화시대, 지방화시대, 세계화 사회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사회 변화의 밑바닥에는 비인간화 또는 무인화 사상이 곁들어 있다. 무인화 사상의 소산인 현대문명사회는 확실히 삶의 생활의 불편과 장애를 없이하고 불편함을 덜어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인간성의 위대함에 대한 실증이다. 그러나 문명의 미명아래 생활 자원을 함부로 개발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파괴하고 따르지 않는 지혜로 여기에 따라 공해로 유독 물질로 인하여 삶의 생활환경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생명의 경시와 천대는 비인간화로 삶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 본성을 지닌 원래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잃은 체 살고 있다. 하느님이 처음 사람에게 부여한 자유의 독자성을 왜곡하고 남용하고 악용함에 따라 그 책임을 인간 스스로가 진다면 거기에 가능성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회개하는 일이다. 인간 스스로가 실현하는 것 그것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곧 자기창조의 인간이 되려면 자기 성찰과 반성이 없으면 안 된다. 여기에 자기성찰과 반성이 없으면 인간이 하느님이 되려는 자만에 빠지기가 쉽다. 그러므로 사람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 따라 그 약속을 지키며 사는 삶으로 “서로 사랑”하는 길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