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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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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는 소통의 마음2
마태복음서 11:17-19; 22:39, 로마서 12:15-21
2018년 2월 11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산업사회는 고향이 없다. 지금의 우리 삶의 공간은 불시에 있다가도 없어지는 삶의 정취도 생활도 도깨비 같은 공간에 삶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미래의 계획도 일시적인 공간의 의미도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을 알게 한다. 사람이 정착할 곳은 언제 어떻게 변할 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옛 고향풍경은 투기의 광기에 사라지고 사람 사는 시골 고향은 날로 삭막해 지고 있다. 여기에 우리 사회는 지금 고향을 버린 탕자 문화만이 성황을 이룬다. 우리가 이러한 사회에서 먹고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수단과 방법으로만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에서 보면 소통이란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이익사회의 결과만으로 소통이 막히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소통이 소통하지 못하는 사회는 신뢰는 없고 갈등만이 남게 된다. 
 뜻 있는 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으로 사느냐'고 묻는다면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산다'고 말한다. 성서에서도 믿음, 희망도 중요하지만 사람에게 제일로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 한다. 사랑은 소통을 모아 들이는 기술을 부린다. 소통은 막힘을 뚫는 것이다. 막힘이 트여야 한다. 트이는 마음이나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려면 먼저 소통의 문을 열어야 한다. 소통 없는 사랑은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 사랑이다. 고착된 사랑은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썩는 물과 같이 사랑이 소통하지 못하면 신뢰가 막히고 갈등 만이 유발한다. 이것은 썩은 물처럼 악취만이 가득하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관계를 통하여서야 만이 정겨운 삶이 나타난다. 소통이 없는 사회나 국가는 자기주장이나 이익의 수단으로 군림하러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강자의 논리만이 문화가 되고 정치가 되고 경제가 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즘적인 삶의 방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목적을 세워 달려가는 것이다. 이것은 희망이 없다. 이것은 삶의 질이 아닌 삶의 수단으로 행동하고 살아가는 삶의 결과는 서로의 이익의 마주침으로 갈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반목 질시하며 서로의 신뢰를 잃고 표리부동(表裏不同)하다. 미국 발 금융위기에 이은 실물경기 침체는 한국경제를 유례없는 어려움에 처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런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에 젖어 들어가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대한 증오심과 갈등이 분출하고 있다. 기업은 구조조정에 내몰리고 있으며 일자리는 줄어들고 자영업자들은 어려움 속에서 희망을 잃어 가고 있다. 또한 민족의 소원인 남북관계는 같은 민족의 화해의 관계를 잃고 경색된 상태로 계속 이어져 가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설을 맞고 있다. 해마다 맞는 설이지만 금년 설은 가축전염병인 가장 위험한 '구제역(FMD)으로 동물들의 살처분하는 것을 보며 전염병 예방으로 고향 나들이를 경계하고 있다. 경계의 위험방지는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들이 저지른 재앙인 것을 알아야 한다.
 설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의미를 갖는다. 가족이 모이면 어른들께 세배 드리고 조상에게 차례를 드린다. 새해에는 깨끗한 새 옷을 입는다. 새해에는 떡국을 먹고 한 살을 더하는 나이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설을 지내면서 모두에게 충만해지는 마음의 정은 삶을 윤택하게 하고 이것은 삶에 희망이 된다는 것이 무엇임을 알게 한다.
 설날에는 세배를 받은 어른들의 삶의 덕담이 삶의 나눔이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을 감안(勘案)하면 설은 소통(疏通)하는 기회가 됨을 알게 한다. 우리나라 말로 '사람'을 무엇이라 하는 가 '사람'은 '사랑'이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딘가? 건물이 아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정겨운 곳이다. 정겨운 곳에 소통이 있다. 사람이 사는 건물은 삭막하지만 사람이 사는 고향은 소박(素朴)하다. 삭막은 쓸쓸하고 막막하지만 소박은 꾸밈이 없고 수수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어디 이어야 하는 곳을 알게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소통을 실현하는 설이 되는 행복한 새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소통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말씀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소통이 이루어짐을 알게 한다. 사랑은 말로서 설득하려는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너에게 내 몸처럼 사랑하는 소통인 것이다. 사랑은 논리적인 좌뇌적인 것이 아니라 우뇌적인 감성적인 종합적인 느낌의 언어인 것이다. 즉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가슴의 언어라는 말이다. 성서는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함과 같도다.'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향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사시는 삶은 한 사람으로 삶을 철저하게 사시는 삶과 삶의 사이에서 삶의 관계를 이루는 그러한 삶을 사시었다. 예수의 삶은 어떤 운영하는 기구를 만들어 기능적인 수단으로 사람을 만나는 그런 삶이 아니었다. 예수의 삶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의식주생활을 같이 하고 있는 그대로 주어진 자연 속에서 사실로 그렇게 사셨다. 그리하여 그의 가르침은 자연을 통한 소박한 생명의 경외로움으로 자연의 하나 하나 비유를 들면서 말씀하심을 알게 한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친구로 삼았다. 죄인과 소통하며 사셨다. 예수 오심은 죄인과 소통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을 내 몸처럼 사랑하신 모범을 보이셨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곧 나의 몸으로 아픔임을 알고 그대로 함께 하시는 삶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 고향인 자기가 나사렛 사람임으로 촌사람을 구태여 나타내 보이셨다. 이것이 삶을 소통하게 하는 것이다. 소통은 삶을 끌어 당기는 힘이다. 소통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설을 맞아 소통의 마음"은 무엇인가? 눈 한번 마주보아 주고 / 내 손 내 밀어 네 손 한번 잡아 주고 / '응! 맞아, 마음 아프다' 하면서 / 속 이야기 한번 들어 주고 / 너를 만나 꼬옥 한번 안아 주는 것 / 이런 소박한 몸의 만남은 몸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만남이며 그 만남은 "설을 맞는 소통의 마음"인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소박한 삶의 자리에서 소통하고 여기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차단하는 것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설을 맞는 소통의 마음1
마태복음서 11:17-19; 22:39, 로마서 12:15-21
2018년 2월 4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날을 우리 조상들은 설이라고 한다. 설에 대한 말은 많이 있지만 여하간 음력 1월1일에 대해서 설날이라 함은 이상이 없다. 설은 새해를 맞는 낯섦과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으로 아직은 익숙하지 않는 '날' 을 설날이라 한다. 설이 '낯설다'는 라는 말은 말의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서 문자 그대로 낯선 새로운 한 해를 맞이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지 미래의 시간을 만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 해'라는 새로운 시간 질서에 따라가는 과정이므로 조심하고 삼가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현하는 날을 맞는 설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조상들은 섣달 그믐날 밤에 방과 마루, 다락이나 부엌에 그리고 마구간이나 측간(厠間=뒷간)에 불을 켜서 나쁜 일은 다 불태워 버리고 어둠을 쫓는 마음으로 불을 켜 놓고 '오는 설날이 좋은 길을 잃지 말고 잘 찾아 들어 오라'는 뜻으로 불을 켜 설을 맞는다. 그리하여 이를 맞기 위해 전통적으로 설날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 없이 일손을 놓고 멀리 타향에서 분주다망 함에도 불구하고 고향으로 찾아와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 옛 일을 회고 하며 회한하는 일로 설을 맞는다. 이는 지나간 시간 동안 잘못했거나 부족했던 점을 털어 버리고 오는 새해에는 새로운 결속을 다짐하며 고향을 찾아 그 동안 소외되었던 가족공동체나 마을 공동체로 소통을 갖는다.
 고향은 사람들의 기초적인 삶의 추억이 얽힌 특별한 곳이다. 이런 의미의 고향은 보다 근본적으로 사람과 토지 사이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관계를 암시한다. 즉 이것은 오랜 삶의 시간을 두고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사람의 심리의 심층에 영토적인 안정감에 대한 충동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토지에 오래 사는 사람들에게는 고향은 몸에 베여있는 본능이고 지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의 삶에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고향의 땅이 단 한 번에 수만, 수십만 달러를 벌 수 있는 수입의 계산으로 알고 투기 열에 들뜬 사람들의 수지 타산으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이것은 현대화의 산업적인 실용주의 사고로 동네, 마을, 읍을 망치고 자신들과 아이들과 놀던 삶을 망치고 있는 그 땅이 결국 금융기관의 손으로 넘어가 부동산 붐의 광기에 들떠 부동산투기의 목적으로 전락하고 있는 곳이 우리 고향의 실제적인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우리는 나의 살던 고향을 잃어 버린 실추된 삶과 인간의 모습을 고향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살던 고향을 추억하지 못하게 한다. 고향 하면 "물결이 노는 것을 보았던 냇물 / 물에서 노는 물고기, 오리나 나르는 새들을 보는 강 / 고향의 집을 우러르던 울타리 / 나를 감싸주었던 친숙한 꽃피는 산골 / 나와 같이 놀던 친구들 / 그 아래 어머니의 집 / 형제자매의 껴안음"을 회상하는 내 고향은 지금은 어디로 가고 점점 사라지고 있다. 명절이 되어 고향에 가보면 자연의 운치(韻致)는 어디로 가고 썰렁한 건물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이것은 고향의 사람들, 엄마 같이 품에 안긴 인상은 고향의 정취를 멀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릴 적 정겨운 일들과 그 동안 무정함과 소외감으로 찌든 삭막한 도시생활에 의해서 지워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연과 삶의 사이에서 존재하는 고향의 만남을 차단하는 것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하느님의 형상
창세기5:1,26,27,잠언27:22,야고보3:9
2018년 1월 28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교의 통찰은 인간의 죄와 고통이라는 실재적이고 현상적인 신학적 주제들로 알게 한다 .예컨대 인간들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인간의 삶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섭리 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은 무엇이고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리고 그 죽음과 종말을 인식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또한 이는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물음들로 발전한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빚어내셨음을 감사하고 존재의 고통과 환희 그리고 무자각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인간에게 창조주의 형상을 내어주심은 인간을 포기(파괴)할 수 없다는 하느님의 의지이고, 끊임없이 삶에 희망을 주시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심이라 믿는 것이다. 생명 중에 가장 완벽한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그래서 어느 인간도 흉내 낼 수 없는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인간의 삶은 그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인간의 길이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간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 과정 속에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하느님의 형상은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청하고 있다. 인간의 죄와 악으로 점철되어진 피조세계의 신음소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매개로 유한자 인간과 무한자 하느님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통해 감각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조세계의 신음소리에 가장 민감했던 인간 그리스도의 삶은 고난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인간은 제 십자가를 지고 그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현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컴퓨터를 이용하는 형상인식에는 문자의 특징을 형상화해두고 손으로 쓰거나 인쇄된 문자를 읽어 이것과 비교하여 어떤 글자인가를 판별한다. 마찬가지로 성문(聲紋)을 형상화하면 음성을 인식할 수 있고 지문을 형상화하면 범죄수사에 유용하게 이용된다고 한다. 이 분야에서 가장 일찍 실용화된 것은 손으로 쓴 숫자를 읽는 우편번호 자동판별기이다. 또 활자로 된 글과 또박또박 쓴 필기체의 형상인식은 이미 실용화 단계로 들어섰다. 이미 시판된 컴퓨터 모니터 중에는 화면에 전자 펜으로 글을 쓰면 내장된 글자인식 장치가 글을 판별하여 건반으로 타자한 것처럼 기억 장치에 입력할 수 있다. 한글의 경우도 획마다 또박또박 쓰는 경우에는 90%의 인식률을 가진 한글필기인식 방식을 이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인공지능연구센터에서 개발했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음성은 변화하는 가청진동수의 형상으로 나타낼 수 있어 음성인식 방식은 이것을 컴퓨터에 내장된 음질과 낱말의 소리의 형상과 비교 판별하여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음성인식 방식은 우선 전화번호 안내에 이용될 것이며, 다음 단계는 인간의 구술(口述)을 컴퓨터 문장으로 옮기는 받아쓰기에 이용된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의 능숙한 기능은 이미 근래 들어 형상인식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축되어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
‘하느님의 형상’이 인간의 자기 초월의 능력을 가리킨데 대해서 최초의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다. 그는 인간의 능력은 하느님을 가리킬 뿐 하느님을 직접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는 인간은 자기 초월의 힘으로서의 그 정신은 사고의 능력으로서의 이성(logos)을 배제하지 않는 것을 의미함에 유의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하는 것은 로고스(logos)가 하느님의 형상을 의미한다고 할 때 이것은 본래 단순히 합리주의적인 이성에 국한하기보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말한 우주적 이성, 보편적 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 우주적 이성에 근거한 데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칼 빈의 “그리스도교의 강요”에 의하면 칼빈은 “영혼의 이성” 속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인간의 자기 초월성과 함께 의지의 자기결정성을 포함시킨다는 점에 유의한다. 또한 여기에 루터는 그의 “창세기 주해”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영혼, 기억, 정신, 지성, 그리고 ‘의지의 힘 이상의 것’이라 말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오늘의 인간은 타락 이전의 아담이 지닌 “하느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있으며 여기에 신학적인 논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로 인정하는 귀결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신학자 K, Barth는 인간은 그의 타락으로 “하느님의 형상”이 소멸되어 버렸다고 하는가? 하면, 브룬너 신학자는 “하느님의 형상이 소멸되었다고 해도 그 형태는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말하고 인간의 구원을 문제 삼는 ‘지적 능력은 어디서 오는 건가?’ 우리가 믿음 안에서 신앙하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