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배실
  2. 금주의 말씀
  3. 인터넷 설교
  4. 배안용 담임목사
  5. 배성산 명예목사

    전체: 843348  오늘: 17  어제: 118

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 Skin Info
  • Tag list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준
창1:27,에베소서4:22-24
2019년 5월 19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삶의 목적과 그 삶의 수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객관적 현실로 맞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나에게 저 세상에서 소명을 받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로의 삶을 살게 하심을 믿음으로 감당하게 하신다. 사실로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으로 밖에 인정받는 수준에 불과함 밖에 없다. 현재 살고 있는 오늘의 삶의 수준은 옛 몇 년 전보다 훨씬 문화를 향유하며 높은 경제적인 수준에서 향유하여 흔히 잘 산다고 한다. 이러한 삶을 향유하고 살고 있으면서 이러한 경제 활성화와 여유 있는 삶을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동양 예의지국이라고 우월적인 삶의 의식은 어디로 가고 생활의 양적인 평창은 확대되어 가고 있으나 그 삶의 내면인 삶의 가치는 어디로 가서 행방이 묘연하다. 말하자면 오늘의 우리 삶의 수준을 보면 한 나라와 삶의 높은 수준에 있는 지도자라 자칭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변칙과 파행, 권위주의의 만행 행태 그리고 정치인의 지도자로서의 자질문제 부족 그 만행에 따른 그 자질 문제 등을 현실로 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삶의 그 자질을 보게 된다. 이러한 현상에 젖아 오늘의 삶을 살펴보면 현대인이라고 자칭하는 오늘의 우리 삶의 수준을 살피게 된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이미 이러한 미국 사회의 병폐적인 사회 삶을 보면서 예수가 보이셨던 그 비극적인 죽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보이어 주셨던 사랑 즉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으로는 가능한 “불가능의 가능성(Impossibility Possibility)윤리”라고 제시함을 알게 한다. 
이렇게 ‘성서적 윤리’는 라인홀드 니버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친다. 사람이 사는 삶에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깨우치게 한다. 이렇게 신학자 니버는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삶에는 반드시‘용서와 자비’의 마음을 새롭게 이해케 한다. 이는 현실의 삶에서 격조 높은 삶의 수준으로 이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제시함을 믿게 한다. 
사람의 존귀한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다. 헬라 사람은 지식을 구했으나 사람의 삶의 가치가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요 실제로 고린도 사람은 향락을 구했으나 사람은 삶의 가치가 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에 있기 때문에 그 까닭을 일깨운다. 로마사람은 권세를 구했으나 사람의 가치가 권세가 아니라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형상이 있기에 가치와 그 수준이 높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준”은 오늘의 신약 본문의 말씀대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아버지 모습을 따라 의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아버지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성품인 하느님의 성품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 안에 있어야 한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 그리고 아버지의 영적인 통일체이며 창조함으로 지음 받은 아버지의 존재이면서 사회적인 조재로서 그 삶을 살게 한다. 
이것이 인간 최고의 삶의 수준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그리스도인의 가정
이사야38:19, 시편17:14,딤전3:12
2019년 5월 12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오늘의 이 사회는 세속화 속에서 공업화, 도시화, 핵가족, 세대문제로 가정부재현상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가정부재 현상은 가정이 비인격적 집단으로 변하고 있으며 교육을 가정외의 기관에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음에 그 문제가 있음도 알게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기독교 교육의 차원에서 예일 대학의 신학부의 '랜돌프 크럼프 밀러'는 기독교교육의 난제를 풀어 줄 단서를 말하는 가운데 기독교적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삶의 가정을 교육의 장으로 하여야 한다고 하며 신학의 재발견을 강조한다. 즉 화해의 목회차원에서 가정을 구속적 세포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가정은 기독교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대 가정의 부모들은 가정을 신앙생활화를 위하여 신앙의 삶의 대화의 장으로 만들어야 하고 신앙의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때에 그 대화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물음과 삶의 목적과 삶에서 참을 추구하는 대화와 만남의 공동체로 삶의 가치와 삶의 생활에서 삶의 자리를 심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함에 주목한다. 이것은 가옥구조의 변화, 과학과 의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믿음의 약화에 기인하며 교회의 미래는 가정에 달려 있고 그 미래는 자녀에게 달려 있기에 가정 공동체 안에서 상호 인격적 신앙적 성숙을 위해 구성원 서로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자기다움을 잃지 않아야 하며, 특히 가정공동체는 진정한 가정은 진정한 부부 사랑의 결실이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최상의 선물인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고 성숙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봉사자가 되도록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쏟는 가정을 말한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준비는 혼인하기 전부터 이루어진다. 가정은 자녀 출산이 부부 사랑의 절정이라면, 자녀 교육은 부모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요 의무이다. 교육에 대한 부모의 권리와 의무는 인간 생명의 전달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본질적인 것도 알게 한다. 부모의 자녀 교육 권리와 의무는 부모와 자녀의 특유한 사랑의 관계 때문에 타인들의 교육 역할과 비교해 볼 때 본래적이고 일차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체하거나 양도할 수 없는 것이므로 타인이 완전히 위임받거나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정은 더욱 풍요로운 인간성을 기르는 한 학교이며 처한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덕행을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이므로, 자녀들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덕행, 친절, 책임감, 정직, 예의범절, 감사하는 마음, 협동심, 이타심 같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가정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전인 교육을 촉진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진심으로 가득 찬 가정환경을 신앙으로 조성해 주어야 하며, 부모는 자녀의 본보기가 되기도 한다. 가정은 성장기의 자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며 체험하고 배운다. 그래서 부모는 사랑에 대한 일차적 교사이며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행동과 언어로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부부 상호간의 사랑과 신뢰가 가장 좋은 가르침이 되는 것이고 이를 체험한 자녀들은 자신들이 성장하며 느끼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사랑과의 관계의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엮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신앙)의 사랑이 가득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는 인간 삶의 갖가지 어려움과 시련들을 이겨 내고 힘 있게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부모는 자녀를 출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녀가 성장하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독립할 때까지 끊임없는 사랑과 관심으로 화목한 믿음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삶이 익혀 나가는 것이다. 오늘의 현대 문명이 물질적 세속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 가정의 자녀조차 신앙에서 유리된 생활을 하기 쉽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에게 풍성한 삶의 바탕에 신앙적인 가치들을 우선적으로 깔고 그러한 삶의 본보기로 사는 삶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인간이냐에 있기에 여기서 충분한 믿음을 일러주어야 한다. 개인주의와 이기심의 극심한 충돌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으로 흔들리고 갈라진 오늘의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 자녀들에게 각 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끌어 가는 참된 정의감으로 무장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특히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염려와 공평한 봉사와 섬기는 참된 사랑의 마음으로 삶이 자라가야 한다. 부모들 자신이 솔선수범하고 가정에서 기도 생활을 실천할 때 자녀들이 인격의 완성과 믿음으로 구원과 성화의 길을 더욱 쉽게 갈 수 있게 된다. 이런 신앙의 체험을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그 삶을 배워가야 한다. 이러한 가정에서 교회의 삶을 공동으로 책임 있게 연대(連帶)하며 살아야 한다. 부모는 말과 모범으로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최초의 신앙 선포자가 되어야 하며, 각자의 고유한 신앙적 사명을 특별한 배려로 육성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가정은 교회의 본질을 잘 드러내고 교회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생명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안에서 노력과 더불어, 자신이 받아들인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가정 교회로서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그리스도와 함께 수행해야 한다. 오늘의 본문은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선물은 시편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자녀는 부모들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양육할 책임을 함께 부여 받았다. 자녀에 대한 기독교적 양육의 책임은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있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독교 가정을 세워 나 갈 수 있도록 부모교육에 힘써야 함도 전제로 한다. 성서는 에서는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대한 명령이 처음부터 부모에게 주어진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부모는 하느님으로 부터 자녀를 위임 받아서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가장 중요한 교사이며, 그 책임은 바로 부모에게 있다.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 자신들이 부모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성경적 자녀 양육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여기에 교회는 자녀양육의 일차적 책임이 있는 부모를 교회가 중요한 교육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 교회가 부모교육 프로그램을 선정하고 개발해야 하는 당위적인 현실에 놓여 있는 "가정부재 현상을 보며"는 오늘의 시대적인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깨닫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창세기20:9, 고전1:23-24
2019년 5월 5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일과 그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 준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나타나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은 축복 받아야 사는 양, 십자가는 단순한 저주 행위로 인지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십자가 지는 고난에 대한 바른 인식의 차원을 교회가 예배로 의식을 집행 할 때 십자가를 상징하며 신앙고백을 하며 기도. 봉헌. 축복을 위한 행사에 십자가를 기리며 행사를 주관함에 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바르게 믿음의 생활을 가져야 함에 이른다. ‘십자가 지는 신앙’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수세기동안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신앙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에 믿음의 강조를 나타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실제적인 면들을 십자가로 강조하는 그 의미로 신앙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사용해 오다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십자가를 장식용과 의식용으로 계속해서 사용해 왔고 영국 교회는 세례식 때 십자가의 성호를 긋는 관습을 계속해 오고 있음을 보며 또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교회는 모두 교회 상징으로 교회 지붕위해 십자가를 세워 교회의 일면을 보게 함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볼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오늘날의 교회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두고 있지만 옛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자리에 십자가를 지고 그 삶으로 믿음의 생활을 함에 주목한다. 여기서 바울 선생은 당시 그의 신앙 고백하는 십자가 (고전1:22-24)신앙에 대한 그의 믿음의 고백에 주목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이니라”는 바울 선생의 신앙고백에 순결하게 따라가는 살의 이 믿음에 오늘의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지는 삶의 자리로 돌아온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몸으로 오셔서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하늘을 향한 구원의 삶을 위한 스스로의 길을 열어 만인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 삶을 넌지시 보여 주심에 감동한 바울선생의 신앙의 삶의 고백을 오늘에 우리는 터득해야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보여 주심에 대한 큰 사랑이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대 사건이다. 하느님의 속성에는 공의와 사랑이 있는데 하느님은 언제나 공의와 사랑을 같이 취급하시고 동시에 공의와 사랑을 함께 나타내 보이신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가 죄 지은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죄를 치를 분은 오직 한분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뿐이시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모든 사람의 아버지 하느님만이 죄 지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신 자이심을 아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랑의 대 사건은 공의와 사랑이 있는 사람의 아버지 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이 친히 사람의 죄를 담당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버지로서 사랑을 보여 주심에 그 사랑을 나타내 친히 십자가를 지심에 모든 죄 지은 자녀 된 인류는 그 아버지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엿보이게 하심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을 십자가로 열어 보이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고개 숙이고 ‘십자가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