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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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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삶은 “치 사랑”(생명의 삶)
요한복음14: 6.히브리서 10:19-20
2019년 1월 13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면 모든 사람들이 한해를 맞이하여 어디에 어떻게 삶을 구사하고 살아가야 할 자기 나름의 삶에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사람의 마음이며 보통의 생각이다. 이리하여 흔히 사람들은 지난날을 회상하고 현실의 삶의 문제를 터득하여 한해 삶의 방향과 그 삶의 의미를 마음에 세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말에 “치사랑이 내리 사랑을 못 당한다”는 말은 치 사랑에서 ‘치’는 “치받다” 뜻으로 무언가를 ‘위로 향하여 끌어 올리는 것’을 알게 한다. “내리 사랑”은 주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반대로 “치 사랑은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내리 사랑과 치 사랑”은 사랑을 주는 방향이 정반대임을 알게 한다. 하늘은 땅 아랫사람을 사랑하지만 땅 아랫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좀처럼 어렵다는 뜻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삶에 그 의미를 두고 삶의 주변을 살피게 되면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자기 행실을 찾는다’는 것은 사람의 그 본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참 생명인 사랑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사랑의 하느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노정에는 반드시 자기 ‘본성’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에서 알게 하고 히브리서10:19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 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시니라”하심을 알게 한다. 구약과 신약시대의 달라진 모습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다름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10:1의 말씀에서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 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하시고 히10:4에서는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하심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대신해 제사드림으로 하느님께 속죄를 바랐으나 예수께서는 삶을 통하여 살아 보여준 사람의 생명을 보장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음을 알게 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삶의 길이요 삶의 진리요 삶의 참 삶인 생명이 되어 오심으로 그 사랑으로 구원의 삶을 승화 시켜 주심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하심을 365일의 한 해의 “생명의 삶”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설을 잘 쇠다.
신명기 6:4-9
2019년 1월 6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양력설을 보내고 나면 음력설을 맞게 된다. 수십 년을 이중 과세로 설을 쇠게 된다. 우리 민족 대부분이 구정을 설로 쇠어 온다. 설을 지내는 것을 '설을 쇠다'고 한다. 한문으로는 '과세'(過歲) 라고도 한다. 이 말들은 설날에는 조상의 은혜를 기리며 조상에게 감사하여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며 부부간 형제간에도 서로 세배를 한다. 
이것은 새해를 맞아 경하하며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인사가 된다. '설'의 의미는 새해 새날이 시작된다는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설날에는 몸가짐에 그릇됨이 없이 '조심하는 날' 이라는 의미가 되며 이를 위해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설을 맞아 가족이 모여 공동의 생활을 통해 '설을 잘 쇤다'는 말인 것이다. 
설날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대가 변하고 사회가 디지털화 되어감에 따라 설날이 주는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옛날에는 설날의 세시(歲時) 풍속으로 설빔, 차례, 세배, 세찬, 덕담, 문안비, 설 그림, 복조리 걸기, 야광 귀쫓기, 윷놀이, 널뛰기, 머리카락 태우기 등 많은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게 전래 되었다. 그 중에서 주목해 보는 것은 차례이다. 이는 명절날이나 조상의 생일, 또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등의 낮에 지내는 간략한 제사를 지내는 차례를 설날에도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성묘를 한다. 
이를 지키기 위해 대 교통 혼잡을 무릅쓰고 원근거리 상관없이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가는 미풍양속이 되었다. 이렇게 쇠는 '설을 잘 쇠었다' 고 한다. 그런데 가정을 중히 여기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하여 못난이로 취급하는 풍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바람직한 일도 아니다. 가정이 안정되어야 모든 것이 안정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정은 나를 다스리고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린다는 곳으로 수신제가를 알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의미이기도 하며 성서적으로는 확실하게 이를 알게 한다.
가정이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서 부터 시작한다. 하느님은 남녀부부를 사람으로 세우시고, 한 가정 안에서 자녀를 만들어 가게 했다. 이 세상의 어떤 제도보다 먼저 존재한 가장 기초적인 사회체계가 가정이다. 그리하여 이 가정 속에서 국가와 사회와 교회의 원형이 나타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정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점에 유의해야 하며 '설을 잘 쇠다' 의 의미는 가정을 살피고 '설을 잘 쇠어야 함' 을 알게 한다. 금년 설날은 주일날이요 설이 함께하는 날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과 설날은 다른 것이 아닌 하느님의 창조의 뜻을 함께하는 날임을 지혜롭게 믿음으로 지내어야 한다. 가정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전래 전통적으로 설날 아침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새 옷을 입고 마음 단장도하며 설빔을 갖춘다. 설날 차례를 마친 후에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이 각 가정에서는 대청마루나 큰 방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조부모, 부모님에게 절하고 새해 인사를 올리며 가족끼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어른들의 덕담이 따르게 되어 있다.
인생을 논 하고 삶의 의미를 알게 하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에 대한 인간의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 세배가 끝나면 차례를 지낸 세찬으로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일가친척과 이웃 어른들을 찾아가서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올린 후에는 가족과 일가친척들과 인사를 한다. '과세 안녕 하셨습니까?' '새해 돈 많이 버세요!' 로 새해를 기원하고 서로 한살 더 먹음에 축하를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설날에 가정예배로 세시풍속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무분별하고 무질서하게 가정이 망가짐으로 교회도 그렇게 가고 있기에 잃어버린 가족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가정과 사회를 보면서 설을 맞이할 때마다 '설을 잘 쇠다' 에 해당되는 의미를 알게 한다. 365일 설 한번으로 가족공동체가 이루어지는 현상 속에서 무너지는 공동체의 사회를 위해 우리의 시선과 이를 극복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가정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태어나서 접하게 되는 최초의 사회이며 삶의 장이고 최초로 인간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원초적인 생활공동체의 장인 것이다. 인간의 삶이 시작되고, 이루어지고, 끝을 맺게 되는 인간의 전 삶을 통해서 이어가는 삶의 구심체이다. 이 가정에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살아가면서 언어와 생활 습관, 문화를 배우고 사랑을 체험하면서 하나의 완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삶의 모태가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인격의 기초가 가족인 혈연집단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가족집단에서의 사회화 과정은 성장 초기에만 이루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인 것을 알게 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가족사회화의 기본적 삶의 틀에서 가족 구성원과의 인간관계를 통해 사회성을 발달시키고 가족문화 속에서 성격을 형성하며 가치관을 학습함으로써 비로소 한 사회원의 구성원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설을 쇠며 생각하는 것' 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설날 행복한 가정과 단란한 가족의 품에서 경험해 내는 좋은 명절은 좋은 학습을 실천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교육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느끼는 것의 하나가 바로 가정에서 배우는 생활교육인 것이다. '세살 버릇 여든 살까지 간다.' 고 한다. 
우리는 날 때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죽는 그 날까지 배우며 살아간다. 삶을 본능이라 하지만 그것도 다 학습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배우되 잘 배우고 진실하고 착하게 배워야 한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그리고 정서적 성장 발달을 도와주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이 인간형성의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과정임을 안다고 하면 가정은 그 인간에게 있어 최초의 교육의 장이며 평생에 걸친 사회화와 교육과정을 통해 자녀의 성장 발달을 도모하는 핵심적인 교육현장이 바로 가정임을 아는 것이다. 요즘은 핵가족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배울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고 또 부모들이 자녀들과 함께 같이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대로 가정교육이 부재 현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가정을 비유하여 '현대 가정이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스위치로 작동하는 곳'이라고 한다.
성서에서 가정은 히브리어로 '바이트' 라 하고 그 의미는 '집'이라 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전을 지칭하는 말과 같이 쓰인다. 사람들의 집과 하느님이 계시는 성전이 같은 단어로 표현된 것은 하느님의 임재가 빠진 가정은 바른 가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한 개인의 존재와 가치는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비롯된다.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 상호간의 결속과 함께 하느님과의 신앙적 결속을 이루는 거룩한 장소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부모는 하느님의 생명을 위탁받아 기르는 하느님과 일하는 자이며 동시에 거룩한 가정을 섬기는 하느님의 일꾼들임을 알게 한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서의 '쉐마'(신 6:4-9)의 본문은 부모가 자녀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책임 하에 양육해야 함을 강조한 점에 유의하게 한다. 히브리어의 원어로 '쉐마'는 '들으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누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고 부모와 가정에서 상호유대와 책임의 소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해를 살아가는 설날 덕담을 이루는 가정생활의 지침이다. 그럼으로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명하셨다. 그 의미는 부모가 이제는 자녀의 신앙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러한 신앙위에 바탕을 두고 부모로서 그 소임을 충실히 감당했다. 자녀들이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 쉐마교육을 시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도록 가르침을 알게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2천 년간 민족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 쉐마교육에 기인함을 아는 것이다. 그 철저한 교육과 인격함양을 위해 그들의 삶은 생명을 다 할 때 까지 최선을 다하여 오늘의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이것은 가정교육의 책임성을 알게 한다.
'설을 쇠면서 '오늘의 사회는 설날 덕담으로 경제만 어려워지고 있음을 보고 말하고 있다. '경제를 살립시다!' '사회의 선진화만 말하는 화두'는 우리 모두가 코앞의 실제적인 면만을 보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 설 날에는 그 화두가 가정으로 돌아 온 모든 식구가 '가정을 살립시다!' 하고 가정회복과 핵가족의 극복을 위해 생각하고 기원하는 설날 인사, 덕담, 기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한번의 '설을 쇠는 것'으로 일 년을 다 살았다는 '설 쇠다'는 아니다. 오손도손 끈끈한 정과 사랑으로 얽힌 가정의 만남이 일 년 내내 '설을 잘 쇤다‘고 마음에 간직하기를 빌어본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사랑의 실천
마태25:35-45,요한복음11:25-26,고전15: 20
2018년 12월 30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생명이 살아 있음은 사랑실천이 그 전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은 그 사랑 실천함에 있다. 우리나라 말로 전하여 온 말에 ‘내리 사랑은 있어도 사랑은 없다’는 말로도 그 의미를 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사에 오셔서 삶을 보여 준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는 하여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에 근거하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기에 창조자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가 사랑에 있기에 우리 사람은 사랑의 자식으로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침(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침을 알게 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으로 오심의 그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사람의 본질적인 속성은 이기심으로 생명의 속성이기도 한다.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속성은 이기심이기에 그리스도 문화권에서 사랑을 둘러싼 동 서양 사상이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인 이기심을 극복하기에 동양에서는 인(因)을 ‘어진 인’으로 ‘자비’라는 사상으로 공자는 ‘효도는 인의 근본’이라는 말에서도 부모 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감정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까지 넓혀가는 것이라 하여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어짐’의 인의 시작으로 말하고 묵자는 친족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사랑을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자비[慈悲]로 말하는 것은 ‘자’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참된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서에서는 마태복음25:35-45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5)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6)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7)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38)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9)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0) 또 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1)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 하였고(41)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3)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44)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그리스도교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이런 에로스적인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실존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무한한 질적 차이” 가 있다고 함에 예의 주의해 보아야 한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 관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교제만이 존재함을 필히 알아야 함에 예의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아가페적인 사랑관계임을 필히 알게 함에 주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는 자아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고조도 열광적인 해체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둘의 주체가 마주하여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존재하는 경우에만 이웃사라의 교제도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여기 필리아의 사랑도 마주하고 존재하는 데에서만 이웃사랑의 교제도 가능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보면 필리아의 사랑도 독립된 이성 간에 성립된 우애임을 알게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문화권에서 사랑을 둘러 싼 이해를 가다듬을 알게 하고 동양에서도 인¹[仁], 자비[慈悲]라는 사상도 있다. 공자의 효도는 “인의 근본”이라는 말에서도 부모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감정을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 까지 넓혀가는 것이 ‘어짐’의 길이다. 
여기서 살피게 되는 것은 생명의 특성은 첫째 무질서한 세상은 더욱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이 있지만 생명은 정돈되고 조직화 되려는 경향이 있으며 둘째로 생명체는 환경에서 화학물질과 에너지를 얻어 자신의 성장과 유지에 이용한다면 셋째 복제에 의해 자신의 유전 암호를 다음세대로 전향하지만 넷째로 생명체는 환경의 특성을 감지하여 반응한다 . 다섯째는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자신을 조절하여 적응한다. 여섯째는 항상성이라는 안정된 정상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생명은 문리적 화학적으로 일정해지려는 경향이 있고 민감성과 반응의 복잡한 체제를 통해 유지되는 특성은 생명체만이 갖는 노하우임을 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오심은 이러한 사랑의 실천에 기인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