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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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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성령론적 윤리)

1999년 5월 23일 성령강림절 설교문

이사야 58:7

사도행전 2:43~47

서울교회(www.seoulch.or.kr) 배성산 목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으며 성령의 역사(役事) 안에서 또 그 역사를 통해 역사 안에 계속 참여 하셨다. 사도행전은 이 세상에서 일하신 성령의 행전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 3:7)라는 표현으로 성서를 인용한 것처럼 사도교회의 선교 사업이 성취한 것은 ‘성령이 행하신 일’로 묘사 될 수 있다. 교회의 이러한 선교 사업은 주님이 최후의 적인 사망을 정복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내용이지만 이 복음을 ‘사회에 변화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실재’로 만들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이 없었다면 세상에는 아무런 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도 성령이시며(계2:7,11,17,29), 교회를 세상에 보내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는 분도 성령이시며(행13:1~4) 교회가 모든 환경 하에서 복음을 충성되게 증거 할 수 있도록 능력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성령은 택함 받은 개인들에게 주어지는 초자연적 계시에서 그리고 놀라운 힘, 용기, 지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 등을 주는 힘에 의하여 그들이 사로잡혀 있을 때에 특히 더 잘 나타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활동 양식으로 처음에 인식되었던 그의 신비한 권능이다. 후에 이 신비한 권능은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와 동일시되었으며 그의 백성에게 부여된 독특한 은사로 간주되었다. 신약에서 이러한 권능은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해 가능하게 된 그리고 영광의 그리스도를 그의 백성에게 중재하고 교회를 그것의 고귀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중재하는 그러한 교회 내에서의 하나님의 작용양식으로 이해된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성령강림사건에 대한 진기한 현상들은 역사와 삶 속에 임하시는 성령의 권능에 비하면 부수적인 요소들이다. 그 신비한 현상들은 꼭 나타나야 할 것들은 아니었다. 오직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계속 진행됨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 성령을 약속한 이들 곧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로 바라는 이들에게 증인이 되도록 성령이 임하셨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타났다. 예수께서 행하신 바대로 가난한 이들과 궁핍한 자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며 이웃을 향하여 열렬한 사랑을 가지고 해방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삶은 예수를 따르는 이들로 하여금 신앙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하였다. 성령은 교회를 탄생케 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각기 맡겨진 사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 이 세상을 떠나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참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이 말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따르거나 동화되거나 타협하는 뜻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하여 이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데는 어떤 선행이나 인간적 공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일단 구원받는 사람은 참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선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는 주의 은총으로 선한 나무가 되었다. 그 때문에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선한 나무라도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선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힘을 다해서 신앙으로 살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선한 나무와 선한 열매를 맺는 생활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되기에 신관에 연관되고, 그리스도인의 은혜와 직결되기에 기독론과 관계되며, 성령의 역사와 관련되기에 성령론과 연관된다. 여기서 기독론적 윤리는 행위의 주체인 인간을 주된 관심으로 삼았다. 곧 그 인간이 구원받은 선한 나무라면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그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자유롭게 행동하면 된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한 행위는 무엇이나 선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로써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는 극복되지만 아주 어려운 윤리적 혼란이 일어난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내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은 좋으나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 즉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규범이 무시된 때 생기는 혼란은 처리할 수 없다. 규범 윤리가 타율에 빠졌다면 상황윤리는 자율에 빠진다. 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만 치중하여 우리의 인간적 현실을 등한히 하고 후자는 인간의 실존적 또는 상황적 현실에 치중했기에 초월적인 하나님의 규범을 등한히 하기 쉽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이를 극복하는 길이 곧 성령론적 윤리이다.

성령은 우리를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 안에 매몰되어 흡수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기독론적 자율이 견제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영은 우리 밖에서 역사 하시지 않고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내재적인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신론적 타율성이 해결된다. 여기에 성령론적 윤리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윤리를 말할 때는 적어도 세 가지가 논의되어야 한다. 첫째는 우리 행동의 지침이 되는 규범이고 둘째는 행동의 주체인 도덕적 자아요 셋째는 행동의 장(場)이 되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는 개인적 윤리가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공동체적 성격을 띤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공동체요 신약에서는 교회 공동체이다. 신앙의 공동체가 전제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가능하다.

신 중심적 윤리가 규범을 강조했고 그리스도 중심적 윤리가 인간 변화를 강조했고 개인의 실존적 상황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상황만 문제 삼았을 뿐 모든 개인이 함께 만나는 공동체적 상황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이런 입장에서 성령론적 윤리가 논의된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올바로 인식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바르게 행동하는 섬김의 삶을 이룬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기독교 윤리의 특색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고 결정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성령에게 맡기는데 있다.

밖으로부터의 타율도 아니고 안으로부터의 자율도 아니다.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이 윤리의 문제는 어떻게 우리 안에서 성령이 활동하게 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의 중요한 열쇠는 어떻게 해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비우고 준비하느냐에 있다. 성령이 역사 할 수 있는 조건과 태도를 준비하기 위해 몇 가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 맡기고 의존하는 태도이다.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나의 공로나 업적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이러한 삶은 내 힘으로가 아니고 성령의 힘과 도우심으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자기가 스스로 노력하고 힘써 성령이 역사 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는 깊은 사랑의 교제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 가운데 있다. 보통 신비주의는 종교적 개인주의로 전락하기 쉽다. 성령운동은 언제나 공동체 가운데 일어난다. 성령은 그 공동체 안에서 역사 하는 하나님의 영이다. 나만의 선행이나 나만의 정의는 있을 수 없다. 나 혼자만의 봉사나 선교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에서 경험한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과 경건을 목표 삼고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데 있다.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날마다 변화됨을 경험한다. 신앙의 삶이란 정지나 휴식이 있을 수 없다. 기다림과 기도의 생활은 윤리적 생활의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방법 중에 하나이다.

우리들은 수많은 선택가운데 살고 있다. 어느 것을 택하여야 나의 삶이 좋아질까 생각해 본다. 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바르게 선택해야 할 사건들이 많다. 하나하나의 선택은 귀중한 것이며 결국 우리의 삶의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삶의 문제를 올바르게 선택하기 위한 많은 규범들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결단이 필요하다. 하나의 결단은 결단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내가 내린 결단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때로는 나의 결단이 내게 기쁨과 만족을 가져 온 다기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 한다. 이러한 삶의 현실에 새로운 길이 제시된다.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는 삶이요 성령이 이끄시는 인생의 길이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2007.04.27 15:46:15
1824

삶의 터전

1999년 5월 16일 설교문

잠언 6:20~23

마가복음 10:14~16

배성산 목사

한 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삶의 터전이 가정이다. 가정은 단순한 집이 아니오 한 가족 모두의 가슴속에 품고 있는 서로의 믿음(信)이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한 가족이 품고 사는 믿음은 뜻을 함께 하므로 한 가 족 마음은 서로 하나되는 삶이다.

마음이 하나되어 오손도손 한 지붕 아래 나누는 삶은 행복과 불행으로 나눌 수 없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마음을 통하고 있으므로 흥정하고 속셈하는 사회와는 달리 가족은 서로 마음을 열고 산다. 한 가족이 대 화를 통해 현실적으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한다. 서로의 이해를 통해 모르는 일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을 나누는 그 자리에 부모와 자녀는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누린다.

행복한 가정은 살 수도, 얻을 수도 없다. 그것이 한 가족이 창조해 가는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돈, 지위, 명성 등등이 행복한 가정을 보증하지 못한다. 서로 사랑하며 믿는 마음을 경(敬)이라고 한다. 믿을 신 (信), 사랑 애(愛)를 하나로 합치는 마음이 곧 경(敬)이다. 가족은 이러한 경(敬)을 잊고서는 행복한 가정을 마련할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다만 어떻게 그 사랑을 베풀고 헤아리느냐에 따라 자녀들은 다르게 자란다. 사람은 고독한 단독자이면서 동시에 사회인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 갈래의 삶을 영위한다. 한 갈래는 자신만이 간직하는 삶이며 다른 한 갈래는 여럿이 더불어 사는 삶이다. 가정 생활, 사회 생활은 다 더불어 사는 삶이다. 더불어 사는 삶에서 믿음보다 더 귀한 것 은 없다. 내가 상대를 믿어주면 상대도 나를 믿어 준다. 이러한 믿음이 튼튼하면 더불어 사는 삶은 순리대로 풀려진다. 순리는 항상 상식의 잣대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잣대를 무시하고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치수를 재려고 하면 탈이 난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목숨이다. 목숨을 물려주고 키우고 길러주며 보살펴 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곧 효 사상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왜 자식은 부모를 모셔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 답을 얻게 된다.

부모를 모실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지극하게 고마워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불효자는 호로 자식 이라고 한다. 호로 자식이란 막되게 사는 자를 말한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양육과정이다. 즉 부모가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을 일컫는다. 성서에서는 아이들을 매우 귀히 여기고 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을 알고도 그리로 올라가시던 마지막 길에서까지 어린이들을 축복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4~15)' 또한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실족케 하는 자에게 무서운 경고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 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가정이란 가족이 같이 살며 배우도록 운명 지워진 곳이다. 가정이란 인간이 스스로 선택할 권한이 없다. 어린아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인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가정이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서 그 구성원들은 서로 피할 수 없는 의무와 책임을 가지게 된다. 그 중에서도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책임은 가장 중요한 책임이다. 어린 시절의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 묘목이 굽으면 그 나무는 성장한 후에도 굽게 마련이다. 아이들의 성격은 어려서 기초가 세워지기 때문에 자녀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막중하다. 여기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이 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전에 부모에게 속했던 많은 의무와 책임들이 다른 곳에 넘어가게 되었다. 지식과 학문, 예의범절까지 일반학교에 의탁하고 교육하고 있으며 성교육 또한 학교 교사나 청소년 지도자들에 의해 전담되고 있는 실정과 심지어 신앙적인 감화나 신앙심도 교회학교나 교회에만 의존하는 일로 인식되어버린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책임은 여전히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교회나 학교에서의 교육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자녀들의 인간관계와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곳은 가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비록 구차한 가정일지라도 또한 가정이 많은 것을 체계적으로 주고받은 일이 없다 할지라도 부모는 자녀들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게 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녀들을 올바르게 가르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있다. 자녀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삶의 터전에서 삶의 교육이 필요하다.

잠언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 찼다. 본문 구약에서 지적한다. 삶의 교육은 지나친 강요와 방관 사이, 지나친 강요와 책임회피 사이에서 중용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범이란 훈련하는 사람의 권위를 표시하거나 권력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가진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이 말하는 내용을 듣기보다는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고서 배우게 된다. 가정의 분위기는 가족들의 생활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교육이다. 생활하는데 본을 보여 주는 무의식적인 가르침은 종교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관계된다. 자녀를 교육하는 문제에 있어서 부부간의 의견일치를 모아서 공동입장을 밝혀야 한다. 만일 자녀들 앞에서 서로의 의사가 다르더라도 그러한 의견에 불일치를 보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 부모가 자녀에게 명령하는 것이니 행하여야 한다는 식의 권위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교육이란 결코 주입적이고,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협력하여 상호이해를 돕는 것이다.

자녀들은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들이 자유를 완전하고 현명하게 사용하여 그들의 욕망과 변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훈련에는 가끔 징계가 수반된다. 성서는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22:15)'고 말하고 있다.

성서는 회초리에 대해서 많은 언급을 하고 있다. 유대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종종 체형을 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체형의 목적은 자녀들이 잘못한 것에 대하여 벌을 줄뿐만 아니라 그의 행실을 고치려는데 있다. 이 후자의 목적은 징계라는 말로서 표현되고 있는데 이 말은 벌을 줌으로써 잘못을 고치고 개선한다는 것을 뜻한다.

현명한 부모들은 징계가 파괴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창조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에게 수없이 벌을 주셨고 이것으로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징계는 하나님의 손이며 회초리였고 또한 어버이로서의 하나님 사랑이었다. 자녀들이 잘못 했을 때 호통을 치고 책망을 하듯이 그들이 잘했을 때는 서슴없이 칭찬을 해주고 격려를 해주어야 한다. 또한 부모는 자녀를 징계한 후에는 그 자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 시켜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자녀들이 항상 자기가 부모에게 사랑 받고 있으며 또 자기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의식할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가정 교육에 있어서 삶의 교육과 안정감을 주는 사랑을 통하여 자녀들은 하나 의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그들 스스로 자신 있게 생을 살 수 있게 된다. 삶의 터전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모든 인간 관계의 시작이고 근거이며 성실과 이해와 책임 및 헌신 등의 속성을 갖는다.

인간관계 가운데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가정은 이 같은 사랑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행복한 가정은 온상이다. 성서에는 잊을 수 없는 가족간의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녀들은 사랑을 받으며 세상에 태어나서 가족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애정에 감싸여서 자란다. 부모, 자녀, 자매, 형제, 부부가 서로서로 애정 어린 관심을 기울인다. 사랑은 가정최고의 아니 삶의 터전의 최고의 존재이유가 된다. 삶의 터전인 가정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인간의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공동체이다.

가정이 모여 지역사회를 이루고 지역사회는 국가를, 국가는 대륙을, 그리고 대륙들이 모인 전체가 바로 인류가 사는 지구공동체이다. 사회의 여러 공동체들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작은 모임은 바로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가정이다. 이 작은 모임 안에서 각 사람들은 서로를 염려하고 일을 분담하며 인내하고 허물없이 지내며 정을 나눔으로서 각기 삶의 기초를 마련한다. 삶의 공동체로서의 가정을 구상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핵가족이후의 사회에서 가정의 축소화를 고려하고 사회의 기반이 될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가지고 오늘의 이 메시지를 전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2007.04.27 15: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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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구하는 것

이사야 40:1~5

마태복음 6:19~34

배성산 목사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의 근원을 찾아가 보면 그 밑바탕에는 국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어야 함을 볼 수 있다. 경제는 성장하는데 국민 생활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삶의 질이 뒷걸음질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와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시야에서 볼 때 한국인의 가치관은 아직도 서구인들의 보편적 개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폐쇄적 집단이기주의에 지배 되고 있다. 보편적 개인주의는 전체사회의 이익과 자기 개인의 이익을 직결시켜 이를 동시에 추구 해야 하는 가치관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폐쇄적 집단이기주의는 전체 사회속에 존재하는 내 가족, 대학 동문, 같은 고향, 같은 성씨와 같은 소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으로서 이들 소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가피하게 배타성을 지니게 된다. 서구의 보편적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인 부정이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고 고발하는 정신이 강하다. 사회 질서를 지키고 사회 시설을 아끼는 마음은 사회전체 이익의 틀 안에서만 개개인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고 개개인의 이익을 존중하는 틀 안에서만 사회 전체의 이익이 극대화 될 수 있다는 이른바 보편적 개인주의를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오늘과 같은 우리 사회에 자리잡고 있는 가치관에서는 합리주의와 효율이 생성될 수 없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6장을 통하여 예수의 3가지 소유에 대한 원리를 배워야 한다. 첫째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물질을 다루기도 하려니와 만들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이 '내 것이다'할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탁하신 것이다. 둘째는 사람은 물건보다 중하다. 사람을 물건으로 다루며 재물을 모으면 그것도 불의한 재물이 된다. 셋째로 재물은 종속적 선이요 최상의 선이 될 수 없다. 돈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 쓸 때 나쁜 것이요 남을 위해 쓰면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을 가진 자는 책임이 크다. 자기 뜻 때로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쓸 것이다. 사람이 먼저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것, 즉 의식주의 해결을 생각하지만 자칫 물질지상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성서는 '먼저'라는 순차적인 언어를 써서 선후로 나누어 말씀하신다. 먼저는 '그의 나라와 의'를 우선으로 강조한 것이다.

한해를 보내고 한 해를 맞으며 송구영신의 인사를 나눌 때 사람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인사한다. 흔히 '복'이라고 전제된 인사말 속에는 물질의 풍요를 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의사에게 새해 인사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했을 때 실제로 그 의사에게 비는 물질의 복이라는 의미는 금년에 치유 될 수 없는 병이 만연하여 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리라는 소망을 담게 된다. 또한 우리가 변호사에게 새해 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고 인사했을 때, 우리는 금년에 무질서와 폭력이 만연하여 변호사가 할 일이 많게 해달라는 소망이 돼버리고 만다. 더구나 장의사에게 비는 복은 금년에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서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소망인데, 만약 우리 사회가 전쟁이나 전염병의 유행, 삼풍백화점과 같은 붕괴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상황이 생긴다면 우리는 장의사에게 내리는 축복으로 봐야 할까?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두 '먼저' 자기 앞의 이익만을 놓고 복을 빈다면 이것이야말로 폐쇄적 집단 이기주의의 현실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하다. 그런 삶에의 의지와 정열은 인간 역사와 문명을 가능케 하는 파토스로 작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한가 무엇이 생명에의 참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런 조건들만을 소유하려든다는데에 있다. 특히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양식은 바벨탑을 쌓아가던 창세기의 고대인들처럼 경쟁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쌓아가는 것으로 삶을 확인하려고 한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최대의 목적으로 할 때 인생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함께 풍성하게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을 오리겐(Origen)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되 더 큰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작은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의 것을 구하라 그리하면 땅의 것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응용풀이 하였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제2건국의 틀'을 짜자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구조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이 때에 우리의 삶 속에 생활의 의식 구조를 다시한번 점검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여행을 해 보면 좋은 환경과 자연 경관이 보전되고 시냇물, 강, 바다 속에 노니는 고기들, 맑은 공기, 주차질서, 교통질서 등 질서 정연한 모습과 마을마다 도서관이나 양로시설, 정년퇴임자를 위한 시설, 의료보험 서비스 등 질서가 있고 걱정이 없을 것 같은 복지사회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선진국 보다 더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선진국의 서민들이 거의 월세로 사는데 비해 우리는 전세나 자기집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나 독일에서 5억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흔치 않다. 이들이 소득이나 월급이 적어서가 아니다. 국민이 내는 세금의 차이가 크게 다르다. 이들은 개개인은 가난하지만 사회는 부유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개개인은 부자이지만 사회는 가난하다. 우리는 먼저 사회재산이라 할 수 있는 공기, 물, 도로, 학교, 철도, 산, 나무 등 사회 공공재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저축에는 4가지 가 있다. 첫째는 세금이다. 둘째는 연금, 의료보험, 생명보험, 출연금 등이다. 셋째는 유산의 사회 환원(상속관념의 극복)이다. 넷째는 자원봉사이다. 부유한 나라 선진국은 자기 재산보다 사회재산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며 순응하려 한다. 폐쇄적 집단이기 속에 갇혀 있는 우리를 일깨우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거품을 빼는 오늘의 현실 하에 개혁해야 할 문화적 한 실례를 들면, 혼례문화를 들 수 있다. 서구에서는 양가 가족과 주례와 함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저녁에는 양가 친척을 초대 하여 저녁식사를 함께 나눈다. 신랑신부는 집마련도 필요없고 생활에 직접 필요한 것만 간단히 장만한다. 우리나라는 청첩장, 방명록, 약혼식, 예단, 함, 폐백, 결혼식장마련, 식사대금 등이 소요된다. 1년에 40만쌍이 결혼한다는데(80만명이 결혼하는 셈) 그 결혼 비용은 평균 3,500만원이라 한다. 이것을 종합하면 1년에 우리나라에서 30조억원이 낭비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30조억은 현재 실업자 200만명에게 매달 150만원씩 1년동안 지급할 수 있는 돈이다. 이렇게 되면 혼례문화 간소화를 위해 개혁해야 할 당위에 놓이게 된다. 귀금속 수입 순위를 보면, 미국, 일본 다음 세 번째가 한국인데 귀금속 수입비용이 10조억원이나 든다고 한다. 이것만 가지고도 실업자 200만명에게 매달 50만원씩 1년간 지급할 수 있는 돈이다.

기독교는 물질을 부정하다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물질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물질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를 기독교는 가르쳐 줄려고 한다. 신약에서 물질의 소유와 사용 그리고 그 분배를 '청지기의 직분'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독교 경제윤리는 첫째 청지기 의식이요 둘째는 소명의식이다. 인간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청지기 의식은 오늘 우리 상황에서 절실히 요청된다. 청지기는 주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 생명과 재산의 궁극적 주인은 하나님이요 청지기는 관리자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충성과 헌신이 요청된다. 한편 소명의식은 우리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직업의식이다. 한 사회의 안전도는 그 사회내의 직업 만족도와 정비례한다. 그렇다면 직업 만족의 근원은 무엇일까? 임금이라 할 수 있겠으나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직업을 가치와 보람의 원천으로 믿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길 때 가능하다. 고도의 물질문명이 가져다주는 폐쇄적 이기주의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심각한 괴리와 소외현상 등은 엄청난 가치혼돈을 몰고 왔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적 추구대상으로 삼을 때에만 모든 염려에서 놓여나 항상 자족할 수 있으리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 경제를 개혁하고 틀을 짜기 위해서, 경제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생산비는 낮고 생산성은 높게 해야하고 경제 정의와 도덕성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구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우리 삶의 현실로 자명해진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