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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다음 세대가 읽도록 주님께서 하신 일을 기록하여라. 아직 창조되지 않은 백성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찬양하도록 하여라.(시 1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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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십자가
창세기20:9, 고전1:23-24
2019년 5월 5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일과 그의 수난과 죽음이 가져다 준 구원의 은총을 믿음으로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나타나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신앙인들은 축복 받아야 사는 양, 십자가는 단순한 저주 행위로 인지하고 있음에 주목하면서 십자가 지는 고난에 대한 바른 인식의 차원을 교회가 예배로 의식을 집행 할 때 십자가를 상징하며 신앙고백을 하며 기도. 봉헌. 축복을 위한 행사에 십자가를 기리며 행사를 주관함에 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바르게 믿음의 생활을 가져야 함에 이른다. ‘십자가 지는 신앙’에 대한 고난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수세기동안 십자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신앙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과 죽음의 권세를 이긴 것에 믿음의 강조를 나타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실제적인 면들을 십자가로 강조하는 그 의미로 신앙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사용해 오다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십자가를 장식용과 의식용으로 계속해서 사용해 왔고 영국 교회는 세례식 때 십자가의 성호를 긋는 관습을 계속해 오고 있음을 보며 또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교회는 모두 교회 상징으로 교회 지붕위해 십자가를 세워 교회의 일면을 보게 함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볼 그 의미를 깨닫게 한다. 이렇게 오늘날의 교회는 십자가를 상징으로 두고 있지만 옛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자리에 십자가를 지고 그 삶으로 믿음의 생활을 함에 주목한다. 여기서 바울 선생은 당시 그의 신앙 고백하는 십자가 (고전1:22-24)신앙에 대한 그의 믿음의 고백에 주목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이니라”는 바울 선생의 신앙고백에 순결하게 따라가는 살의 이 믿음에 오늘의 우리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지는 삶의 자리로 돌아온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몸으로 오셔서 스스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넘어 하늘을 향한 구원의 삶을 위한 스스로의 길을 열어 만인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그 삶을 넌지시 보여 주심에 감동한 바울선생의 신앙의 삶의 고백을 오늘에 우리는 터득해야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보여 주심에 대한 큰 사랑이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나타난 대 사건이다. 하느님의 속성에는 공의와 사랑이 있는데 하느님은 언제나 공의와 사랑을 같이 취급하시고 동시에 공의와 사랑을 함께 나타내 보이신다. 예컨대 인간은 자기가 죄 지은 대가를 치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 죄를 치를 분은 오직 한분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뿐이시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모든 사람의 아버지 하느님만이 죄 지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신 자이심을 아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 십자가 사랑의 대 사건은 공의와 사랑이 있는 사람의 아버지 되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이 친히 사람의 죄를 담당하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버지로서 사랑을 보여 주심에 그 사랑을 나타내 친히 십자가를 지심에 모든 죄 지은 자녀 된 인류는 그 아버지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엿보이게 하심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사랑을 십자가로 열어 보이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고개 숙이고 ‘십자가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십자가 지는 부활신앙
요한복음11:25-26. 갈라디아6:8
2019년 4월 28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상에서의 삶의 교훈은 십자가 지는 복음을 설파하심에 예수 부활을 보면서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의 산상 교훈의 자리를 보면 언제나 먼저 거듭남을 예고하시고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영적 생명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육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인 거듭남에서 즉 성령으로 거듭남에서 구원의 역사를 알게 한다. 영적 생명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주관 하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육신의 부모로 부터 태어난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 위로부터 거듭난 영적 생명을 부여 받아야 함을 깨우치게 한다. 이는 오직 영적 생명을 부여 받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알게 한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축제로 서성거리는 모습에서 성서의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자기희생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십자가를 잃은 부활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공의와 사랑이 담긴 그 의미가 부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희생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는 아버지 되신 하느님의 자기희생이다. 하느님이 사람의 몸으로 친히 오셔서 인간의 죄의 댓가로 스스로 행하심의 뜨거운 사랑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를 화목(propitiation), 구속(redemption), 칭의(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로 이는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성찬시에 마시고 떡을 먹는다는 그 의미는 생명의 근본이요 본체이신 말씀을 따른다는 결단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성찬식의 결단에서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삶을 영위한다는 그 뜻은 예수를 믿는다는 그 뜻은 사람 사는 사회의 삶에서 사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여 갈라디아서6:8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하심을 주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심에 주목하게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복음이라 한다. 그 복음서에서 주목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고난의 말씀의 짐으로 우리 모두의 귀감이되는 삶의 교훈임을 알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의 삶에서 친히 보여 주신 삶의 진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며 고난의 형극을 연기하는 배우 노릇으로 보는 전예를 벗어나 형극의 삶의 자리 현장에서 삶의 자리를 펼쳐서 삶을 정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으로 부활의 사실에 “십자가 지는 부활신앙”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원초적으로 펼쳐 구원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예수 부활의 의미
시편49:8.잠언1:19,요한복음11:25-26
2019년 4월 21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그리스도교의 중심 교리인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며, 이렇게 그가 죽음을 정복함으로써 모든 신자들이 '죄·죽음·악마'를 물리친 그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을 부활절 또는 부활제라고 하는데, 이날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요축일이다. 복음서 기록에 의하면 여자 제자 몇몇이 예수의 무덤으로 갔는데, 이 무덤은 산헤드린(유대인의 최고 종교법정)의 일원이며 예수의 은밀한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에 있었다. 그들은 거기서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의 시체가 무덤에 없음을 알렸다. 나중에 여러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보았고, 심지어 그가 문이 잠긴 방으로 들어오는 것도 보았다. 또한 제자들은 갈릴리에서도 그를 보았다(예수가 나타난 장소와 시간에 관해서는 복음서마다 다름). 복음서 외에 부활한 주(主)가 40일 동안 지상에서 활동하다가 승천한 것을 언급한 기록은 〈사도행전〉에만 있다. 이슬람교에서도 심판 전에 죽은 자가 부활한다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와 비슷한 신앙은 누구도 실제로 보지 못했고, 이후 직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던 이도 고작 스무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예수의 육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사실과 그 후에 예수가 자신을 방문했다는 사도들의 확신은 가히 세계를 바꿔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 명백하게 불가능한 사건이 문자 그대로의 진실이라는 점에 대해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을 품었으며, 이는 그들의 도덕, 문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에 극적인 영향을 끼쳤다. 로마의 속주인 유다에서 카리스마 있는 치유자이자 떠도는 계시록 설교가였던 예수는, 전통적인 많은 관습을 고의로 조롱하고 유대주의의 기반인 모세의 율법 대신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여 유대인의 종교적 제도를 전복시켰다. 그가 유월절 축제를 위해(날짜는 확실하지 않지만 서기 3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은 자신의 운명과 대면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고 해석해 왔다. 산헤드린(고대 예루살렘의 유대인 최고 의회이자 법원과 대제사장이 선고를 내리고, 로마 총독의 도움을 빌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했다. 한 신도가 그를 개인 무덤에 묻었고 로마 군인들이 경비를 섰는데, 사흘 후 그의 유해는 사라졌다. 그날, 그리고 이후 몇 달간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친구들은 살아 있는 모습의 예수를 목격했다고 확신했다. 첫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였고, 이후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예루살렘과 다른 곳에서 예수를 보았다. 그 결과, 예수의 추종자들은 그의 가르침과 죽음을 재평가했고, 그 안에서 비길 데 없이 강력하고 긍정적이며 변화를 낳는, 하느님이 내린 메시지를 보았다. 오늘날까지 그 메시지는 온 세계의 사람들을 강하게 이끌고 있다.
예수 부활에 관한 기록은 신약성서 4복음서 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초대 교회의 보편적 확신과 합의를 표현하는 다양한 신학적 표현들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발견해서 알수 있음을 믿음으로 신앙인들은 믿음으로 이를 감당하게 한다. 그래서 그 이후 예수 승천하심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 되심을 믿고 사랑으로 이를 감수하는 것이다. “예수 부활의 의미”는 죽음 이상의 생명으로 사랑을 강조함에 그 의미를 두고 있음에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