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셈의 땅
마가복음서 14:22~25, 갈라디아서 1:11~17, 창세기 10:21~31, 시 22:23~31
2019년 10월 6일_배안용 목사(ab@seoulch.kr)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곧장 아라비아로 갔다(갈 1:17)고 전합니다. 아라비아는 나바테아왕국입니다. 나바테아왕국의 수도인 페트라는 요르단 서쪽지역으로 향료, 금, 약제 등의 무역 도시입니다. 이 땅은 노아의 장남 셈이 물려받은 땅입니다. 바울이 셈의 땅으로 간 것은 아마도 그가 핍박하던 예수공동체와 그가 속해있던 극진적인 바리새파 사람들을 피해서 비교적 유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라비아 땅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신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지 않았으나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아랍계 유목민인 배두인(Bedouin)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거지인 천막을 만드는 특출한 기술이 있었는데, 바울은 이들에게서 천막 깁는 기술을 배우고,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로마의 부유했던 지식인으로서 천막 작업을 하는 막노동은 그를 사회의 최하위계층으로 전락한 경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셈의 땅, 즉 아라비아에서 생활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을 정립하고, 천막기술을 배워 자비량自費糧 선교를 준비했습니다. 주후 34년에 헤롯 안티바가 나바테아왕국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들은 유대인들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광주리에 담겨 성벽의 창문(고후 11:33)”으로 도망쳐 몰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보내는 보름동안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고, 자신이 깨달은 예수님의 신학적 사상을 토론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4년여가 지난 후 안디옥에서 ‘신을 경외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디아스포라가 있는 이웃나라들의 유대인 집성촌은 예루살렘 성전의 자금원이었기에 집중적으로 관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안디옥에는 유대인 집성촌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으로부터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았고, 할례를 받지 못한 ‘신을 경외하는 자’들이 쉽게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바나바를 파송(행 11:22)하자, 바나바는 다소에 있던 바울을 찾아 함께 안디옥으로 갑니다(11:25~26).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행 11:26)”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티안’이라는 말로, ‘크리스디아노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헤로디아노이’로 불리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헤로디아노이’는 유대의 헤롯 아그리파를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대인의 피가 섞인 아그리파는 유대에서 황제숭배를 거두게 하면서 유대인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며, 유대의 민심을 얻기 위해 베드로를 투옥시켰고, 야고보를 사형시켰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메시야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아니라 권력을 손에 넣은 헤롯 아그리파라는 믿음을 가진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유대 전체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헤롯 아그리파에 열광하고 메시야로 따르는 ‘헤로디아노이’에 반대하여 ‘성경의 말씀대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야로 따르는 사람들은 ‘크리스티아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하늘의 권력이고,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따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에 하신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성만찬을 실행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저녁을 함께 먹으며 말씀을 나누고, 식후에는 잔을 들고 말씀의 의미들을 되새겼습니다.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서의 만찬과 같은 방식(막 14:22~25)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디옥 교회에서 율법수호를 주장하는 열광주의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 보다는 율법준수를 우선시 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이런 분쟁은 ‘예루살렘 1차 공의회’에서 결국 바울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셈의 땅에서 소명의 삶을 시작했지만, 그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큰 시련과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소명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소명을 받은 우리는 ‘헤로디아노이’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을 메시야로 믿는 ‘크리스티아노이’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의 소명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