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십자가! 다시, 봄3
요한복음서 1:14~18, 고린도전서 1:18~25, 신명기 21:22~23, 시 37:28~40
2019년 8월 5일_배안용 목사(ab@seoulch.kr)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희망은 민족의 독립입니다. 바빌론에서 해방되었지만, 외세의 간섭과 침입은 계속 되었고,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강대국이 등장할 때마다 불안한 시대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로마시대에도 계속됩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는 유대 백성들은 자신의 땅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땅이 아니었고, 로마와 유대 권력의 횡포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의 시민도 그리 편안한 세상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로마는 계급이 철저히 지켜지는 사회였기에 계급제도의 가장 위에 있는 황제 외에는 모두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세상입니다. 또한 로마는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곤고히 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들은 전쟁터에 나가야 했습니다. 로마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고, 시민들은 자신의 재력으로 전쟁에 참여 했습니다. 
큰 부자들은 하인을 거느리고 기마병으로 참여했고, 부자들도 중무장 보병으로 참여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져 올 수 있는 간단한 무기만을 가진 일반 보병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전쟁은 씨를 뿌린 뒤에 전쟁을 하고, 추수 때는 추수에 참여 하며 참가하는 형태였지만, 정복 전쟁이 길어지고, 전쟁터가 멀어지면서 농사를 망치는 일이 벌어지고, 결국 시민계급이 몰락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유대 백성들은 시대를 통해 악한 사람들이 로마와 권력가에 기대 잘 사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영적인 세계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인 로마의 시민들도 헬라철학을 통해 지혜를 찾으며,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헬라철학은 실험과 논리로 증명 가능한 과학적인 것을 추구했으나, 신비주의 성향을 지닌 종교철학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헬라철학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지혜의 최고를 객관적인 나를 바라보는 ‘관조’의 단계를 위해 명상과 사색을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철학은 하늘의 것, 하늘의 지혜를 추구합니다.
그리스철학은 진정한 지혜, 즉 하늘의 지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것은 질병과 전쟁으로 불안하기만 한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운명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지혜를 알면, 계급의 상승과 부의 축적이 가능합니다. 로마 사회는 ‘파트로네스(귀족)’와 클리엔테스(그에 예속된 평민)‘라는 관계에 의해 형성됩니다. 이 둘은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입니다. 클리엔테스가 경제적 위기에 빠지면 파트로네스가 도와주고, 귀족의 재정상태가 나빠지면 클리엔테스가 공동으로 돕습니다. 클리엔테스가 사업을 시작하면, 파트로네스는 인맥을 동원하여 사업이 성공하도록 후원합니다. 파트로네스가 공직에 입후보하면 그에 속한 클리엔테스들은 적극적으로 선거를 돕는 관계입니다. 
소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관계 속에서 둘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는 일로 적극적인 ‘황제 숭배’를 내세웁니다. 황제를 신神으로 숭배하면서 둘의 공생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고, 로마에 대한 동경과 황제에 대한 충성을 자랑합니다. 이런 이유로 십자가 처형은 로마 사회, 아니 세계의 질서를 뒤흔드는 반역자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 사람들은 기대를 가졌던 예수의 십자가 소식을 애써 부정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로마인들이 유대 사람의 율법준수를 보고 매우 윤리적인 민족이라 평가하는 것에 반해, 정말 민족의 자존심이 심하게 무너져 내리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무 것도 못하고 사형대에 오른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는 보지 말자’고 주장하며, 하느님은 인간의 영혼에 복을 주시는 분으로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능력(고전 1:18)”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논리로 지혜를 증명하려는 사람들에게 “현자, 학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1:19)”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그 지혜로(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였다(1:21)”고 강조합니다.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강대국 로마에서 그리스철학을 자랑하는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1:22),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1:23)” 하고 말합니다. 십자가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지혜로는 무모한 어리석음으로 보이겠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요, 하느님의 지혜(1:24)”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소명공동체로서 주님의 십자가를 새롭게 다시 바라봅시다.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