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알게 하는가?
레위기22:29,마태복음23:9,요한복음1:14,로마서8:15-17
2017년 10월 8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가을은 ​알게 하는가?"​ ​를 ​보게 한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기능적, 기계적 가치가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 여기에 따는 삶의 가치가 우대받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테크놀로지의 이데올로기가 보편화 되어 있는 우리의 현실을 알게 한다. 예컨대 사람을 양육하는 인간교육이 학교교육에서 배제된 채 그 교육은 기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교육만이 한영을 받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조는 공부로 배움을 키우는 지식기능능력을 우선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기업도 성과를 올리는 관리자로 여기에 유능한 인재만을 우선하여 출세와 승진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에 눈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수단과 방법에 개의 않는 현상이 자본주의가 되면서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가치만을 위한 삶으로 우리의 삶은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이를 정당화함에 주목하게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을 부의 창출과 증식이라는 돈벌이의 관점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러한 돈 벌이는 경쟁력, 효율성, 생산 등으로 유익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을 다스리고 국민을 구제함으로 이루는 삶의 경제를 알아야 한다. 
여기에 대하여 성서신학은 "하느님의 형상"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칼 바르트의 신학적 견해를 알​게​ 한다.​인간이 '이성을 선물로 받은 존재'라는 중세기의 견해를 반대하고 인간의 존재와 그 구조나 성향, 능력들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으려는 시도를 거절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인격적 관계능력에 있다고 주장하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남녀 인간과 인격적으로 관계하며 교제할 수 있는 능력과 실존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윤리 교육뿐만 아니라 교육의 목적 자체는 자아실현이라는 의미가 중요하다. 인간의 자아실현이 교육을 통하여 달성 하려는 인본주의 교육의 전통은 이미 그리스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자들과 루소, 페스탈로치로 연결된다. 교육의 목표는 기계적인 사람이나 지식인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전인(whole person)적 존재를 기르는 것이라 하였다. 전인적 사람들은 사랑하고 깊이 느끼며 그의 내적 자아를 확대하고 자아 교육의 과정을 계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은 인간 중심주의가 아니라 하나님, 인간, 자연과의 생명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면 인간 사이에 불신과 반목이 생기고 인간 사이의 관계 상실이 자연을 황폐케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땅이 인간에게 엉겅퀴와 들풀을 내어 인간이 하는 노동이 저주받는 노동이 되게 하고 반면에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을 보전하며 인간의 신뢰도가 창조질서를 회복하면 땅에서 강물이 흐르고 온갖 들판에서 과실이 맺는다는 것이 창조의 증언이며 이것이 성서의 증언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맥추절 감사 절기를 지키는 것은 땅이 자연적으로 소출을 낸 것에 대한 감사이고 이것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징표로 믿었던 것이다. 홍수사건 이후 노아에게 새 문명을 명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서 억울한 눈물은 흘리게 하지 말 것과 동물을 피 채로 먹지 말도록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형평성 못지않게 인간과 자연간의 정의도 역시 생태학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이 이 또한 생명관계를 알게 하는 것이다. 감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은혜의 고마움이다. 그리하여 감사의 마음은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감사는 감사해야 할 조건적인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는 사랑의 보답이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들어있는 온 공간과 시간의 전체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예컨대 인간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에는 아무 이유나 조건이 아닌 사랑의 관계이듯이 사랑의 관계이다. 그리하여 그럼으로 그 관계의 나타남은 감사와 은혜뿐이다.
​ ​그럼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항상 조건반사적인 태도이다. 그렇다고 동물처럼 동물이 그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후천적으로 가진 반사작용과 같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그런 조건반사가 아니라 정녕코 감사는 고마운 마음을 나타내는 인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죄 사함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십자가 은혜가 바로 그것이다.'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씨 (心根, 心相, 心情)를 알게 한다. 그리하여 복을 누리면 행복이 온다. 행복을 누릴(살면서 즐기는)줄 아는 자가 복을 불림(鍊鍛) 할 줄을 안다. 남의 가지고 있는 물질적 소유가 아니라 이미 내가 가진 것을 돌아보며 지금 이것에 누릴 줄 아는 자이다. 일의 성취도나 성공해서 얻으려는 행복이 아니라 주어진 삶의 현실에서 청빈(淸貧), 정결(貞潔), 순명(順命)을 누리며 삶이 풍성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복이 있는 자' 이다. 복은 어떤 목적에 이용되는 인적, 물적 근원인 세상의 자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원(資源)으로 만족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알게 한다. 산상수훈에서 복은 자기의 소유에서 오는 부유함이 아니라 사람의 됨됨(being)인 하나님의 자원에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복이란 삶에서 삶을 누리는 좋고 만족한 마음의 현상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알게 하고 행복은 그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에서 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예수의 산상수훈의 8복은 "복이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열거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복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른다. 이러한 자는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에 있는 자를 '행복한 자'라 하는 것이다. 복이나 행복은 세상 것의 얻음이 아니라 이러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나라(天國)가 채워지고 마음 거울로 그 나타남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산상수훈 8복에 이어 다음으로 구사하기를 예수께서는 즉시 이르시되 '너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되라'고 삶의 자리를 펼치신다. 이 수훈은 말씀만이 아니라 그리고 아주 귀중한 삶의 실제(實際) 생활에서 청빈, 정결, 순명을 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이어서 삶의 규범으로 예수와 율법의 실제로서 구약의 옛 약속인 옛 율법을 완성케 하신 예수의 삶인 사랑의 새 율법으로 십자가로 친히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게 하여 이를 사랑으로 완성하게 하신다는 것도 여기에 피력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므로 복은 삶이 새로워져야 하는 생활의 행위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에 기본적인 복과 행복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복 있는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리스도교의 창조질서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원(하나님의 형상)으로 복을 살아가는 삶을 알게 한다. 즉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하나님의 자원의 복으로 사는 삶이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세상의 자원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보게 한다. 말하자면 이 삶은 자기 목적을 위해, 자기 자원으로, 자기 방법으로 사는 마음의 상태를 알게 한다. 자기의 힘, 자기의 지혜, 지식, 재능, 능력, 부, 건강으로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인 지위를 위해 살고 있는 삶을 알게 한다. 여기에 반대로 시편기자는 '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144:15).라고 말한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을까? 하는 이유를 엿 본다. 이는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에덴의 동산에서 처음 복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나 사람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어김으로 죄에 이르는 경위(涇渭)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연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몸담고 있는 환경 세계 전체이다. 그러나 자연이라는 그 개념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다르고 종교에 따라서도 다르다. 고대와 근대가 같을 수 없고 서양과 동양 간에도 차이가 난다. 흔히 넓은 의미로 자연을 논하는 데에 목적론적 자연관을 살펴보아 그 속에서 목적의 개념을 이해하려 한다. 옛날에는 하늘이 인류의 아버지이고 땅은 만물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자연은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오늘날 자연은 그 신성함이 상실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신학자 몰트만은 '내재적 초월'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신의 창조와 자연의 진화를 종합한다. 비록 세계가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신다고 주장한다. 자연은 이용 가능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공간이다.​ 그럼으로 은혜는 이유 없이 온다.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는​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된 사랑만은 언제까지나 마음속에 오래오래 깊이 간직되어 있다. 이 간직된 마음이 무엇인가? 이 간직된 사랑이 사라나는 것으로 감사를 알게 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원본이기 때문이다. 고로 이것은 우리의 희망이요 아름다움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맑고 깨끗하고 순수하기에 배려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봉사와 희생을 자처하는 것이다. 바로 이 사랑실현에 감사를 잘 살펴서 간직하는 것이 감사의 갈무리이다. 그리하여 세월과 때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창조질서를 통하여 이 땅위서 이루어 가고 있든 것이다. 이를 알고 믿음의 생활을 하면 세상에서 사는 삶은 불평이나 불만은 없어 질 것이다. 변하지 않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은 날마다 새로운 감사를 알게 된다. 이는 이 세상의 한날 괴로움을 이기고 인내할만한 충분한 까닭을 알게 한다. 이 세상의 감의 이유나 조건들은 변할 수 있지만 그 구원의 감사는 믿는 자 누구에게든지 공평한 것이며 살아가는 날 동안 주어도 드려도 한없이 부족한 은혜로운 감격에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복된 “복 있는 자”이다.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복된 복음이다.  

시(詩)​ "가을은 알게 하는가?" 泉水(샘물)

샘물(泉水) 배 성 산
 
 
가을은 가을인가 산마다 들마다 푸른 하늘
황금물결 그윽한 향기 정말 가을인가 보다
누구의 말림도 수고도 없이 가을은 오는가!

화려한 단풍과 떨어지는 나무잎에서
우수(憂愁)의 마음이 물들어가나 보다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 해가 기우는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마음이 몸에 젖어
새삼스레 연약함을 느끼게 하는가 보다
가을은 상념(想念)으로 계절을 알게 하는가!

한 해의 익은 곡식과 과일을 거두어들임은
풍요한 온갖 생명을 보게 하는 것인가 보다
이 생명 다하여서 저 생명을 알게 하는가!

가야 할 시간 돌아 올 때를 기다림에 서서
흐르는 세월은 눈물을 헤프게 하는가 보다
이른바 "가을은 알게 하는가!"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