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설교 블러그 - 샘물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설교
뒤죽박죽 한 사회와 교회를 본다.
디모데후서 4:3-4, 사도행전4:32-35, 마태복음 19:16-30
2012. 2. 5.
배성산 목사(baessaem@gmail.com)
풍요한 자본주의를 갈망하는 현대사회는 사회주의형 인간을 생산해 내어 시장경제의 혜택을 받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경제적 번영과 풍요가 주어진 조건이요 대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오늘의 풍요는 과거 가난과 절망 속에서 오늘의 경제시장을 만들고 치열하게 싸워왔던 노력이었다는 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삶의 진정성과 자기 책임의 가치는 과거 역사이자 생활양식이라고 치부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에 넘쳐나는 포르노와 동성애, 강간과 간통, 근친상간, 폭력적이고 잔인한 영화, 살인 무자비함, 우선순위와 존경의 상실, 이혼과 가족의 해체,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 쾌락추구와 퇴폐문화, 맘모니즘, 광적인 진화론과 무신론, 인본주의에 준한 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 도박, 인신매매, 짓밟힌 인권, 기계적인 인간관계, 다양성에 복잡한 사회 등 세기말적인 현상들이 오늘의 우리 시대는 사물이나 사실들이 마구 뒤섞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된 뒤죽박죽 한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옛 유럽교회의 몰락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회의 변화에 대한 발 빠른 대체 없이 몰락하는 이유를 알게 한다. 이는 사회가 발달할 수록 교회가 성서의 가르침과 현대인의 생활방식과의 간격이 벌어지고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점을 알게 한다. 교회가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의 삶 속에서 보여주는 교회가 만사형통과 소유의 축복으로 일관된 가운데 풍요한 삶의 향유만을 만끽한 점이 사회와 다른 바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렇게 교회의 가르침과 삶이 성서의 말씀에서 멀어지면서 세속화의 위험에 잠기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과거 유럽 교회를 비롯한 선진국교회들의 위험성은 성서와 삶의 간격을 좁히지 못한 점에 기인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현대판 최고의 교회당 이미지로 가난과 고난을 부르짖지만 더 이상 가난한 자가 아니며 거룩한 믿음을 부르짖지만 세상과 하나되어 살아간다. 가난한자에 대한 애통한 마음을 부르짖지만 나름대로는 가능한 만큼 부를 축적하며, 죄인에게 복음과 전도를 외치지만 자신이 직접 그 삶의 현장에 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가질 필요를 모른다. 현대 교회를 지적하면 돈과 소유를 윤리의 기준으로, 축복의 기준, 성공의 기준, 능력의 기준으로 여기고 이를 실행하며 교회는 자랑한다. 유럽교회가 문을 닫고 몰락해 온 그 처사(處事)를 알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서의 말씀을 상고하면 디모데후서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라는 준엄한 말씀을 듣게 된다. 본래의 처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함께 서로서로의 삶을 나누며 공동체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한 가족으로 삶을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 주인 되시는 한 가족으로 삶에 부름 받아 살았다.
이 공동체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회 구성원으로 풍성하고 향기로운 사랑과 신앙과 희망으로 공동의 삶의 비전을 보여준다. 여기에 성령의 오심으로 상호 교통, 교제는 영적, 정신적, 물질적 교제를 온전한 나눔으로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삶으로 살았다. 삶의 현장에서 직접 일어나는 나눔에서 삶의 자리를 보게 한다. 사도행전에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웃과의 관계가 자기 자본적인 소유가 있고 없는 것을 넘어서서 서로 융통하는 유무상통(有無相通)함으로 막힘이 없이 서로 관계하는 소통(疏通)을 이루는 것을 알게 한다.
이렇게 처음 교회의 순전 한 성장은 욕심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담보하고 이를 철저하게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까지 교회가 가능함을 알게 하고 중세의 종교개혁은 자기의 생명을 주님께 내어 놓았기에 가능함을 보게 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부흥운동은 부패한 사회와 교회의 회개라 한다면 종교개혁은 변질되어 버린 신앙의 순수성과 예배의 단순함에 치중했으며 예수님의 삶의 전부를 순수하게 삶의 자리에 내려 놓았다. '오직 믿음', '오직 성서'는 말씀이 삶의 자리로 내려옴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말씀과 삶의 현장이 서로 소통하는 자리임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성취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향유하는 개인적인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에 한 개인의 삶이 중요함을 알게 한다.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말한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있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받은 고난과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없고 가치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구주가 되고 우리 안에 거해야 된다'는 진정한 호소는 오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위해 그 몸이 희생의 사랑이 필요한 것을 절박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만물의 모든 삶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은 자신의 욕심을 포기하는 자리에서 자란다.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삶과는 여하간에 굴러가야 하는 수레바퀴이다. 자신의 욕심과 자기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오늘의 교회가 부흥하는 것이 풍요한 삶의 량이 아니고 삶의 질이 부흥하는 것이 되어야 하고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 삶의 자리는 가난하고 겸손하고 낮아지는 자리이다. 주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외로운 자, 갇힌 자, 나그네들과 자신을 언제나 변함없이 동일한 자리를 펼치신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는 우리에게 삶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시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의 문제는 계명을 넘어선 '네가 온전하기를 원한다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 네 보화가 있다. 그리고 나의 삶을 따르라'는 말씀에 주목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수단이 아니다. 지금 나의 삶이 구원받으려면 나의 삶이 삶의 현장에 내려져야 한다. "뒤죽박죽 한 사회와 교회"를 보면서......
내가 메마른 산에서 강물이 터져 나오게 하며, 골짜기 가운데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겠다. 내가 광야를 못으로 바꿀 것이며, 마른 땅을 샘 근원으로 만들겠다.(이사야41:18)


